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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선비들의 스승 신독재 김집(金集)61 완결
이름: 芝谷/良中


등록일: 2013-07-14 14:12
조회수: 1163


  18일에 하교를 받고 애책(哀冊)의 정식(程式)에 대해 아뢰었다.
  옛 제도는 사왕(嗣王)을 ‘효자 신 아무〔孝子臣諱〕’ 또는 ‘효손 신 아무〔孝孫臣諱〕’로 칭하였는데, 이번에는 예관이 고쳐 ‘유아사왕주상전하(惟我嗣王主上殿下)’로 칭하자고 하니, 정원(政院)에서는 그도 타당치 않다고 아뢰었기 때문에 상이 선생에게 물어보라고 했던 것이다. 이에 선생이 아뢰기를, “인문(人文)이 잘 갖추어진 시대가 바로 당송(唐宋)이어서 우리도 조종 조에서 그대로 따라 행한 전례가 있으므로, 이번에도 그에 의하여 칭위(稱謂)를 정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였다. ― 당송 때의 고례(古禮)는 효자 또는 효손 신 아무로 칭하였는데, 󰡔동문선(東文選)󰡕에는 ‘신 아무〔臣諱〕’의 두 글자가 없고, 우리 문종대왕(文宗大王) 때는 ‘효자사왕(孝子嗣王)’이라고 칭하였기 때문에 선생이 이렇게 아뢴 것이다. (󰡔신독재전서󰡕, 「연보」)

  이와 같이 김집의 예학은 당시의 국가적 사업에 관여하지 않는 바가 없을 정도로 그 수준을 인정받고 있었다. 김집은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의 문의에 답변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대표적 예를 살펴본다.

  이상보에게 답하다. 갑오년 10월
  보내 주신 별폭(別幅)을 자세히 보니, 전번에 말씀을 잘못 올린 것 같습니다. 감실을 넷으로 한 사당 제도와 󰡔대전(大典)󰡕에 있는 백세불천(百世不遷)의 법과는 서로 차이가 있어 변통하지 않았지만 할 수 없이 사당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은 전번에 대략 말씀드린 문제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말씀드릴 것은 종손(宗孫)과 고조와의 사이에는 친(親)이 아직 다하지 않았으므로, 고조가 비록 사당에서 나와야 할 경우라도 금방 최장방(最長房) 댁으로 옮겨서는 안 되고 종손의 세대가 다하기까지는 반드시 별실(別室)에서 제사를 모시다가 종손이 죽고 나서야 비로소 옮겨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만 예법(禮法)과 정의(情義)가 다 갖추어질 것이니, 이로써 영원한 세식(世式)을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

  혹자는 기왕 사당에서 나온 이상 순서에 따라 일단 최장방 댁으로 옮겼다가 다음 또 차례가 되면 다시 종손 댁으로 모시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지만, 그것은 장유(長幼)의 서차만 알고 세적(世嫡)의 뜻은 생각지 않고 한 말이어서 예의 근본 뜻이 아닐 것입니다. 대감의 종가 댁으로 말하면, 덕천군(德泉君)의 별자(別子)로서 당연히 백세불천의 신위가 됩니다. 종손이 덕천군에게 7대손이 되므로 사당의 네 감실 내에서 덕천군은 서쪽 첫 번째 감실에 늘 모셔져 있어야 하고, 종손의 증조가 두 번째 감실, 조부가 세 번째 감실, 고위(考)가 네 번째 감실에 모셔져야 하며, 신종(新宗) 이하 대감의 고조와 종손의 고조는 다 사당에서 나와야 합니다. 이러한 큰 절목(節目)에 관하여는 식견이 얕은 이 사람이 감히 입을 놀릴 일은 물론 아니지만, 물어 오셨는데도 끝까지 입을 다물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주제넘은 짓을 했다는 꾸짖음을 면하기 어려울 듯하니, 많은 이해 있으시기 바랍니다.

  김집은 이와 같이 자세하게 상대방의 물음에 답함으로써 답변하는 자체가 예에 충실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김장생과 김집이 이룩한 예학의 수준은 이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것이었으며, 그 이후에도 비견할 만한 것이 없는 한국 최고 수준의 예학이었다. 이 부자간의 학문적 성취를 주변 인물들이 ‘전문지업(專門之業)’이라고 하였으니, 이들의 학문적 성과를 짐작할 만하다. 김장생이 예학 시대의 문을 열었다면 김집은 그것을 계승하여 완성하였다. 김집 예학의 특징은 예의 본질을 깊이 인식하였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는 예야 말로 사람의 사사로운 욕심을 억제하고 하늘의 이치를 드러냄으로써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이는 공자에서 주자로 이어지는 정통 유학자들의 사상과 일맥상통한다.

  이에 그치지 않고 김집은 예를 중심으로 사회와 국가를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이 그의 예치론이다. 예로써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먼저 임금이 마음가짐을 바르게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김집은 현실적인 문제를 직시하면서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김집 예학의 특징으로 고례를 중시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김집은 당시의 사람들이 너무 예를 쉽게 여겨 처리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고례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정통 예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김집이 현실을 무시하면서까지 고례를 추구한 것은 아니다. 김집은 인정의 이치에서 발생하는 예를 중시하였는데, 이는 김집 예학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예라고 하는 것이 관념적 사실이 아니고 인간이 현실세계에서 지켜나갈 구체적 행동규범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현실과 인정을 중시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김집은 종법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겼다.

  김집의 예학이 지금까지 후학들에게 감동을 주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진정한 예의 실천자였다는 사실이다. 김집은 예를 단순히 학문적 대상으로 여겨 연구만 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는 일상생활에서 철저하게 예를 실천함으로써 자신의 학문을 진정으로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제자들이나 주변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으며,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앞으로의 과제는 이러한 김집의 예학을 현대 실정에 맞게 발전적으로 개선하는 작업이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국역신독재전서 1․2󰡕, 민족문화추진회. 2001. 12. 15
󰡔영원한 선비 사계 김장생󰡕, 논산문화원. 2000. 12. 30
󰡔주자가례󰡕, 주희지음, 임민혁 옮김, 예문서원. 1999. 12. 2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사계 김장생과 신독재 김집의 예학사상 연구󰡕, 한기범, 충남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1990.
「신독재 김집의 종법인식과 실천」, 한기범.
「신독재 김집 선생의 예교」, 김선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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