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유교학회 2001년도 하계학술회의

沙溪·愼獨齋 思想의 綜合的 照明


일 시 : 2001년 7월 4일 (수), 10:00∼18:00

장 소 : 돈암서원(충남 논산시 연산 소재)

주 최 : 한국유교학회

후 원 : 충청남도/사계·신독재 기념사업회/돈암서원

 

韓 國 儒 敎 學 會

한국유교학회 2001년도 하계학술회의 일정

▷ 주제 : 沙溪·愼獨齋 思想의 綜合的 照明

▷ 일시 : 2001년 7월 4일 (수) 10:00 - 18:00

▷ 장소 : 돈암서원(충남 논산시 연산 소재)

사회 : 안재순 (강원대 교수)

○ 인사의 말씀 김용걸 (한국유교학회장)

○ 환영사 김영원 (돈암서원장)

○ 기조발표 : 사계·신독재 사상의 특성 최근덕 (유교학회 이사장)

○ 제 1주제 : 사계사상의 연원 황의동 (충남대 교수) ,논 평최일범 (성균관대 교수)

사회 : 이문주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

○ 제 2주제 : 사계경학의 특징과 그 경학사적 의미

- 사계의 {대학} 해석을 중심으로 이영호 (성균관대 강사) ,논 평 권정안 (공주대 교수)

○ 제 3주제 : 신독재의 철학사상 윤용남 (성신여대 교수) ,논 평 최영찬 (전북대 교수)

○ 제 4주제 : 사계의 예학사상 한기범 (한남대 교수) ,논 평 도민재 (영산대 교수)

○ 제 5주제 : 사계사상이 후대에 끼친 영향 김문준 (건양대 교수) ,논 평 이상호 (경산대 교수)

사회 : 최영진 (성균관대 교수)

○ 종합토론

沙溪思想의 特性

崔 根 德 (成大 儒學·東洋學部 敎授)


穆陵盛際란 말이 있다. 穆陵은 宣祖(朝鮮 第14代王 在位 1567∼1608)의 陵號로 그의 在位期間인 41年間을 文運興盛時代로 규정하고 하는 말이다. 대충 꼽아 봐도 退溪李滉(宣祖 3年卒) 高峯 奇大升(5年卒) 德溪 吳健(7年卒) 一齋 李恒(9年卒) 休庵 白仁傑(12年卒) 栗谷 李珥(17年卒) 思菴 朴淳(22年卒) 蘇齋 盧守愼(23年卒) 鶴峰 金誠一(26年卒) 松江 鄭澈(26年卒) 牛溪 成渾(31年卒) 龜峰 宋翼弼(32年卒) 西厓 柳成龍(40年卒)등이 이 期間에 晩年을 보냈고, 沙溪 金長生·寒岡 鄭逑·旅軒 張顯光·愚伏 鄭經世·愼獨齋 金集등이 旺盛하게 活動을 하고 있었으며, 眉未 許穆·敬堂 張興孝·同春堂 宋浚吉·草廬 李惟泰·美村 尹宣擧·尤庵 宋時烈등 훗날의 巨儒碩學들이 젊음의 情熱을 硏學에 쏟고 있었다.

人物의 興盛이 이와 같은 반면에 葛藤과 挫折과 慘憺도 뒤섞여 갈마들고 있었다. 士禍의 不吉한 꼬리를 물고 朋黨이 싹트는가 싶더니 드디어 東西로 갈라져 黨爭으로 激化되고, 太平聖代를 틈타 島賊이 7年동안 全國土를 짓밟고 焚蕩질을 했다. 참으로 崎嶇하게도 黨爭은 學問·學脈·行誼에다 政治的 命運과 連繫되고, 外敵의 侵奪은 忠君愛國에 義理精神의 試驗臺로 그들을 올려놓았다. 이 期間의 선비들은 누구나 學問的 評價 外에 보다 峻嚴한 義理의 踐履를 要求받는 所以然이 바로 여기에 있다.

沙溪는 龜峰과 栗谷의 門下에 出入해 兩門에서 함께 嫡傳으로 評價받는다. 그만큼 뛰어난 學者다. 儒學史에서 性理學 定着期의 第一世代를 退溪 高峯 栗谷으로 친다면 沙溪는 第二世代에 屬히게 되고 禮學 開花期의 第一世代를 退溪 龜峰 栗谷으로 꼽는다면 역시 沙溪는 第二世代다. 이로 보면 沙溪는 어느 모로나 <위에서 받아 아래로 이어 주는> 곧 繼往開來의 位置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沙溪思想의 特性을 알아보는 것은 그의 學脈 곧 栗谷을 頂點으로 하는 畿湖學派의 主流를 貫通하고 있는 學問的 要訣과 修行方法을 穿鑿하는 일이 된다.


위에 든 觀點을 念頭에 두고 沙溪思想의 特性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學問·行誼의 旨訣을 "直"에다 두었다.

直은 用心의 要訣이다. 그에 따라 修養의 窮極處이기도 하다. 易經을 보자.

{直은 그 바름이고 方은 그 옳음이다. 君子는 敬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義로써 밖을 바르게 한다. 敬과 義가 서서 德이 외롭지 않게 되는 것이다.}

坤卦 六二爻의 爻辭 <直方>에 대한 풀이인데 直은 마음이 부드럽고(柔) 순하며(順) 곧고(貞) 굳은 것(固)이라 했다. 마음이 事物 비추기를 마치 맑은 거울처럼 바르게 해서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게 하되 흔들림이 없이 곧고 한결같다는 뜻이다. 일찍이 孔子도 孟子도 이 直에 留意했고 程朱는 平生 行誼의 守則으로 삼았다. 嫡傳弟子라 할 尤庵의 다음 證言에 다 含意되어 있다.

{朱子가 돌아가기 며칠 전 제자 여럿이 問病을 하고서 가르침을 청하자, 그에 대답하기를 "학문하는 요체는 오직 일마다 낱낱이 그 올바른 것을 살피고 求해서 그릇된 것을 決斷해 버리는 데에 있다. 이렇게 해서 공부의 쌓임이 오래 되면 마음이 이치와 더불어 하나가 되어 저절로 發하는 바가 모두 私曲이 없게 되는 것이다. 聖人이 萬事에 應하는 것이나 天地가 萬物을 낳는 것은 直일 따름이다." 라고 했다.} 그는 이어 스승에게서 받은 가르침에 대해 말했다.

{우리 文元公(沙溪)선생께서도 늘 이를 외어 나에게 가르치시기를 "내 평생에 행한 일들에 비록 착하지 않는 일이 있다 치더라도 일찍이 남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비록 마음에 發해 밖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치더라도 진실로 착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면 남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너는 모름지기 이런 마음을 체득해야 한다. 이 한 直자는 朱子가 실상 받은 바가 있다. 孔子께서는 <사람의 삶은 直이니, 그렇지 않고 사는 것은 요행히 禍나 免하고 사는 것>이라고 하셨고, 孟子는 <스스로 돌이켜서 곧으면 비록 千萬人이라도 나는 가서 對敵할 것>이라 하였으며, 浩然之氣를 論해 <直으로써 길러 害침이 없다면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게 된다.>고 하였으니, 朱子가 실로 孔孟의 統을 이은 것은 오직 이 한 字뿐이다."라고 하셨다.}

尤庵은 {沙溪선생의 學은 오로지 確 한 字에서 나왔고 매양 直 한 字로써 立心의 要訣로 삼았다.}고 確言하고 있다.

둘째. 禮를 學問의 中心에 두었고, 朱子家禮를 禮의 中心에 두었다.

沙溪의 莊重渾厚함을「地負海涵」(땅이 온갖 것을 다 실어주고, 바다가 모든 물을 다 받아 주듯이 너그럽고 크다는 뜻.)과 같아서 限界지을 수가 없다고 했거니와 그는 당시 性理學 中心의 學風에서 한 발 앞으로 나아가 禮를 바로세우고 넓히는 作業에 專心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타고난 莊重이 地負海涵의 境地로 익어갔다는 德談을 듣기에 이르렀다. 禮의 踐履 效果를 스스로 증명해 보인 實例라 할 수 있다. 그는 朱子가 規定한 禮의 定義 「天理之節文 人事之儀則」을 金科玉條로 삼아 <天理의 節文을 排析하고 人事의 儀則을 證定>하는 사이에 어느새 禮를 學問의 核心으로 삼기에 이르렀고, 그 결과 家禮輯覽 喪禮備要 疑禮問解 祭儀正本 禮記記疑등등 우리 禮學史上 初有의 巨作이 나오게 된 것이다.

沙溪가 『家禮는 사람을 敎化시키고 風俗을 아름답게 하는 책』이라고 했을 때 이미 禮를 모든 學의 中心部에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그 中心部의 師匠이 朱子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다. 朱子尊崇은 스승인 栗谷이나 龜峰에게서 받은 바도 있었다. 그는 일찍이 서슴없이『만약에 朱子가 없었다면 堯舜周孔의 道가 캄캄해졌을 것이다. 비록 二程이 있지만 그들의 經傳註釋에는 疑心할만한 곳이 많고 또 따르기 어려운 곳도 있다. 栗谷은 항상 말씀하셨다. 『내가 다행히 朱子後에 태어나서 學問이 거의 어긋남이 없었다.』 沙溪는 敎學하는 次序도 小學 다음에 朱子家禮를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朱子家禮에 얼마나 篤實하게 精力을 쏟았는가를 스스로 밝힌 逸話가 있다.

{어느날. 家禮 親迎의 附註「圍布?筵」에 대해 강의하시다가 말씀하셨다.

"오래 전에 하루는 송강(松江 鄭澈)이 家禮를 들고 찾아와서는 이 주석을 가리키며 ‘내가 되풀이해서 연구를 해도 끝내 이해할 수가 없으니 좀 자세히 설명해 주게’해서 내가 하나하나 해석해 주었더니 대단히 좋아하면서 ‘이제야 의문이 확 풀렸으니 다행 다행이로세’하고 돌아갔는데 얼마 후 經筵(임금과 신하들이 경서를 강론하는 자리)에서 물러나 곧장 나를 찾아와 웃으며 말하기를 ‘오늘 기이한 일이 있었다네. 강론이 끝난 후 상감께서 가례를 내놓으시며 <이 대목에 대해 여러 번 반복해 새겨 봤지만 끝내 막히는데 여러분 중에 누가 설명해 주겠는가. 사양말고 가르쳐 주오.> 하시는데, 내가 가만히 보니 그저께 자네에게 배워 간 바로 그 대목이더란 말이야. 다른 사람들은 모두 모르겠다고 아뢰더구먼, 내가 나서서 자세히 설명해 드렸지. 그러자 상감께서 <대단하이. 확 뚫렸어.>하시며 재삼 칭찬하시더니 이어 <내가 경서공부에서 이 註처럼 어려운 대목은 처음>이라 하시고는 <정철은 벼슬도 높고 일도 많은 사람이 오히려 경서공부를 이처럼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대체 왜 못하는가?> 하시는지라 모두들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했다네. 그러니 나도 <실은 신(臣)도 몰랐사온대 그저께 김모(金某=沙溪)한테 배워서 알게 된 것이옵니다.> 하는 말이 입밖에 거의 나왔지만 종내 토설하지 못하고 말았다네. 후에 賞으로 下賜品까지 내려왔으니 정말 모두가 자네 덕이니 나눠 갖어야 하지 않겠나’하더란 말이야.}

沙溪는 덧붙였다.

{상감(宣祖)께서 바쁜 정치의 와중에서도 이런 글들에 관심을 쏟고 그리고 이해가 되지 않으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뿐 아니라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니, 옛날 夏의 禹임금이 조그만 일까지 일일이 챙기든 것이나 周公이 밤을 새워 정사를 보던 전례인들 이보다 더 하겠는가. 내가 병자년(선조 9년)에 중국에 가는 使臣편에 家禮중에서 의심나는 대목을 기록해서 禮部에 문의해 보라고 했더니 사신이 돌아와서 하는 말이 "예부에 문의했더니 그쪽 벼슬아치가 웃으며 대답하기를 '우리들이 主로 따르는 것은 皇朝禮일 뿐 가례는 알 바가 아니라.'라고 하더래. 대저 가례는 化民成俗하는 책인데 예부에서 평소에 들쳐보지도 않아 군색하게 되자 황당한 소리로 호도하니 참으로 불성실한 작태가 아닌가. 중국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중국에서 朱子學을 숭상하고 있지 않다는 일단이기도 하지.}

沙溪의 가례에 대한 공부가 얼마나 깊었던가를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주자학에 대한 애정도 짐작할 수 있는 逸話다.

셋째. 禮說도 時宜에 맞아야 하고, 經傳註釋도 先正의 說을 굳이 따를 必要는 없다고 했다.

沙溪는 喪禮備要 凡例에서 ①補充해야 할 것은 補充했다.(可補者 補之) ②고쳐야 할 것은 고쳤다.(可改者 改之) ③옮겨야 할 것은 옮겼다.(可移者 移之) 고 했고, {儀禮 家禮가 今制·國制와 서로 異同이 있는 것은 그대로 함께 두어 참고하도록 했다.}(若儀禮家禮今制國制 有相異同者姑幷存之 以備參考) 고 했으며, 家禮輯覽 凡例에서도 {俗制로 便宜한 것은 아울러 두어 使用하는 사람이 選擇할 수 있게 했다.}(旣有家禮儀禮舊制 然亦有俗制之便宜者 則?存之 使其用者 有所擇焉)고 했다. 禮도 時宜에 맞춰야 한다는 것과 時王之制·國制·國俗이 알맞게 參酌되어야 한다는 것은 그의 禮思想을 一貫하는 所信이었고 著述에 그대로 反影되어 있다.

그는 一世代인 退溪나 栗谷의 禮說 또는 禮에 대한 接近方式을 明確하게 批判한 적도 있고 同時代의 禮學者인 寒岡 鄭逑에 대해서도 {寒岡의 禮說은 엉성함이 있다.}(寒岡之禮說 有闕)고 指摘한 적이 있지만 禮書나 經傳이나 그 解釋에 있어서 대단히 嚴格했고, 先正의 說이라 해도 檢證없이는 따르지 않았으며, 일단 誤謬가 認定되면 假借없이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經傳공부를 하다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나 의심이 나는 부분이 있으면 굳이 선생의 해석을 따르려고 애쓰지 않고 따로 적어 놓고는 혼자 연구를 거듭했다.

{어떤 이가 물었다. "先正의 가르침이나 해석을 後學이 마땅히 존중하고 믿어야지, 감히 論議를 한다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 아닌가?" 내가 대답했다. "義理를 講論하는 것은 天下 公共의 일이다. 先賢도 또한 일찍이 그렇게 생각했다. 中庸或問 大學或問을 봐도 알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어찌 감히 先正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것인가. 다만 여러분과 더불어 論難하고 商訂해서 그 是非를 바로잡고자 할 따름인데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沙溪가 책을 끼고 龜峰의 門을 두드렸을 때는 열 세 살의 紅顔少年이었다. 그 以前에는 변변히 공부를 하지 못했다. 열 한 살 때 어머니(申夫人)를 잃었고, 아버님(黃岡 金繼輝)은 자주 外職에 나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내가 어릴 적에 공부할 기회를 잃었다.}(余少而失學)고 述懷하곤 했다. 퍽으나 孤獨한 어린이였다. 性稟만은 莊重했었다. 함부로 웃지 않았고 말수도 적었다는 것이다. 그런 소년이 자기보다 열 네 살 위인 맏형 뻘 되는 二十代 후반의 근엄한 선생님 밑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으니, 여간 껄끄럽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말한다.

{나는 龜峰에게 近思錄을 배웠다. 구봉은 대단히 英邁해서 글을 보면 막힘이 없었다. 남도 자기와 같은 줄 알고 한번 읽어 내려가고 나면 다시는 풀이 해 주지 않았다. 나는 처음에는 망연히 배우지 않은 것과 같았다. 물러나 조용히 앉아서 보고 또 보고 무척 辛苦를 했고, 읽고는 생각하고 생각하고는 읽으며 밤낮으로 쉬지 않은 그런 뒤에야 점차 깨우쳐 갔으며, 천번 만번 생각을 거듭해도 깨우쳐지지 않아야 선생에게 물었으니, 글공부에 나처럼 부지런과 수고로움을 겪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初學부터 刻苦勉勵의 過程을 거친 것이다. 공부뿐만 아니었다. 아주 가난한 생활이었다. 밥상에 간장조차 오르지 않았다. 그저 한 줌 소금을 입에 털어 넣어 밥을 넘겼다. 한 해를 넘겨 공부하고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 婢女의 집에 들렸더니 아욱국을 끓여 주었다. 어떻게나 맛있었던지 老年에 이르도록 그 맛을 잊지 못했다. 마치 시우쇠(精鐵)를 달구듯이 孤獨과 辛苦와 勤勞 그리고 困窮속에서 그의 修行은 鍛鍊되어 갔다. 그러기에 나이 여든이 넘도록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서 세수하고 머리 빗고 衣冠을 整飭해 띠 두르고서 家廟에 展謁하고는 書室에 앉아 조용히 책상을 對하되 결단코 事物이 마음을 흔들지 못했다.}

沙溪는 다시 栗谷의 門下에 들어 공부를 했다. 율곡은 그보다 열 두 살 위였다. 우리 儒學史의 頂點에 서게 되는 두 巨儒에게서 道를 傳해 받게 된 것이다. 沙溪는 두 스승의 嫡傳弟子로 理學과 禮學을 받아 다음 世代로 傳해 주었고 그를 잇는 綺羅星같은 駿足들이 드디어 巨大한 學脈을 이뤄 이 나라의 精神史를 가꿔 왔다.

沙溪 金長生의 思想的 淵源

황 의 동(충남대)


<목 차>




Ⅰ. 서언

Ⅱ. '성리학에서 예학에로'의 관심 전환

Ⅲ. 사계의 師承관계와 사상적 연원

Ⅳ. 사상적 연원

Ⅴ. 결어

 

Ⅰ. 서언

조선조 유학은 15세기 도학시대를 거쳐 16세기에 이르러 성리학의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晦齋 李彦迪, 退溪 李滉을 중심으로 한 主理的 성리학이 전개되어 왔고, 또한 花潭 徐敬德을 중심으로 한 氣철학이 하나의 줄기를 이루며 전개되어 왔다. 아울러 高峰 奇大升은 퇴계와의 성리논변을 통해 조선조 성리학의 수준을 일층 끌어올렸으며, 牛溪 成渾과 栗谷 李珥 또한 성리논변을 통해 자신들은 물론 조선조 성리학의 폭과 깊이를 더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17세기에 이르러 역사적 상황은 크게 달라졌고, 이에 따라 사상적 흐름도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 난데 이어 다시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을 겪게 되었으며, 당쟁의 심화, 李适의 난(1624), 인조반정(1623) 등 정치권의 동요가 심각하였다. 아울러 계속되는 가뭄과 기근, 유행병의 창궐, 민생의 궁핍 등으로 17세기는 유례없는 내우외환의 위기였다. 따라서 사상적 흐름도 思辯的인 성리학만으로는 현실적 위기에 대처하기 여려웠으므로 사상적 흐름도 다양한 전개양상을 갖게 되었다. 즉 임란을 전후해 전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양명학이 지하로 뻗어나갔고, 청의 침략 앞에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의리학이 천명되었으며, 경세치용, 이용후생, 실사구시의 실학이념이 폭넓게 전개되어 갔으며, 또한 전쟁과 당쟁 그리고 민생의 위기에서 비롯된 윤리강상의 위기 앞에서 실천윤리의 학적 모색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17세기 유학의 多岐化 현상은 달라진 현실에 대한 사상계의 새로운 반영이었다.

沙溪 金長生(1548-1631)은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전반을 살다 간 조선조의 대표적인 유학자이다. 그는 靜菴 趙光祖의 德治, 退溪 李滉의 道學, 栗谷 李珥의 學問, 尤菴 宋時烈의 義理와 더불어 '禮學'으로 이른바 '조선조 五賢'으로 추앙 받아 왔다. 또한 李圭景은 {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退溪 李滉의 德, 磻溪 柳馨遠의 經綸, 淸陰 金尙憲의 節義, 花潭 徐敬德의 天文 등과 함께 사계의 예학을 일컬어 동국제일의 인재라 말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평생을 예학에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여 '東方禮學의 宗匠'으로 불리웠다.

뿐만 아니라 그는 栗谷 李珥, 龜峰 宋翼弼의 嫡傳으로 기호유학의 중심적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율곡학파의 문호가 넓어지고 본격적으로 융성하게 된 것은 사계에 의해서라 할 것이다.

그 동안 사계에 관한 연구는 예학과 성리학의 양 측면에서 많이 이루어져 왔다. 특히 예학적 측면의 연구가 국사학계 및 철학계를 중심으로 활발히 이루어져 왔다. 한편 그의 생애나 사상적 위상에 관한 연구도 이루어진 바 있으나 사상적 연원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는 미흡했던 것 같다. 그것은 사계의 학문적, 사상적 연원이 너무나도 분명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즉 사계의 학문은 예학과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그 연원은 구봉과 율곡에 연원하고 있다는 것이 하나의 상식처럼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사계의 학문이나 사상이 구봉과 율곡에 연원하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사계의 사상적 연원도 한번쯤 체계적으로 검토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어떠한 철학이나 사상도 그것이 형성되고 정립되는 사상적 배경과 연원이 있게 마련이다. 사상이 형성되는 직접적 간접적인 요인이자 뿌리가 된다. 대체로 특정인의 철학사상에 있어서는 삶의 배경과 역사적 배경, 그리고 師承관계가 중요한 요인이 된다. 사계에 있어서도 그 사상적 연원에 대한 해명은 이러한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제 사계의 사상적 연원을 구체적으로 검토해 보고자 한다. 먼저 사계가 성리학에서 예학에로 관심을 전환하게 된 배경을 검토해 보고 그의 사승관계를 짚어 볼 것이다. 이어 그의 사상적 연원을 예학적 연원, 성리학적 연원으로 구별하여 검토하고자 한다.

Ⅱ. '성리학에서 예학에로'의 관심전환의 배경

사계의 철학사상을 고찰함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성리학에서 예학에로'의 방향전환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사계가 성리학을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지만, 이는 한국유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임진왜란 이후부터 실학이 대두되기 이전 약 백여 년을 예학의 시대로 규정하는 것이다. 예학이 융성하게 된 첫 번째 배경은 성리학의 심화과정에서 예의 의식적이고 자율적인 遵行을 강조하는 추세로 나타난 것이고, 또 하나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결과 기존의 사회질서는 물론 가치와 윤리의식이 혼란에 빠져 윤리강상의 재건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전자는 사상적 배경이 되고 후자는 역사적 배경이 된다. 즉 17세기에 이르러 예학이 하나의 시대사상으로 흐름을 갖게 된 것은 무엇보다 성리학과의 표리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본래 성리학은 예학의 철학적 근거가 되고, 예학은 성리학의 外在的 실현에 그 목적이 있다. 예의 원리는 의리를 밝히는데 있고, 의리를 탐구하려면 성리학에 조예가 깊고 논리가 정밀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窮理의 學으로서의 성리학을 연구하고 踐履의 學으로 예를 연구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성리학과 예학은 상호 내외표리의 관계가 되어 어느 하나도 폐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16세기 성리학의 발달은 필연적으로 예의 의식적이고 자율적인 실천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17세기 예학의 대두는 16세기 성리학시대의 뒤를 이은 자연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예학시대 도래의 역사적인 배경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조가 처한 현실적 상황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과 같은 외침을 당하였고, 당쟁의 심화, 이괄의 난, 임꺽정의 난, 광해군의 패륜, 인조반정 등 정치, 사회적인 혼란과 가뭄, 기근, 질병 등으로 인한 민생의 궁핍현상은 미증유의 국가적 위기였다. 이러한 현실에서 개인과 가정, 사회, 국가의 윤리질서가 급격히 혼란을 맞게 되었고, 가치관에 있어서도 엄청난 변화를 수반하고 있었다. 이에 새로운 시대를 위한 질서의 재편과 윤리의 확립이 절실히 요청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임난과 호란을 전후하여 전국 곳곳에 鄕案과 鄕約 및 洞約이 일반화 되어지고, 서원이 급증하고 있음에서 윤리재건을 위한 당시 지식층의 자구적인 노력과 윤리의식의 사회화 경향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그러면 사계에 있어 성리학에서 예학에로의 관심의 변화는 어떤 배경에서 가능했던 것일까? 물론 사계의 경우도 위에서 지적한 두 가지의 사상적, 역사적 배경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계에 있어 성리학에서 예학에로의 관심이 전환된 배경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대체로 이제까지의 학계 시각은 위와 같은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고 보여진다. 그런데 논자가 보기에는 적어도 사계의 경우 성리학에서 예학에로의 전환은 역사적 배경보다는 성리학에 충실한 나머지 도학적 사명의식에서 비롯된 면이 더 컸던 것으로 생각된다.

사계는 13살 때 구봉의 문하에 들어가 사서와 {近思錄}을 통해 성리학을 배웠고, 또한 예학의 기초적인 공부를 받았다. 사계는 {家禮輯覽} 서문에서 "내가 어려서부터 {가례}를 받아 읽었는데 능히 밝게 알지 못함을 병으로 여겨, 친우 申義慶과 몇 해 동안 강론하고 또 師門에 나아가 質正하여 드디어 그 대략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서 볼 때, 사계는 어려서부터 예학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것이며, 예학에 조예가 깊었던 구봉의 문하에서 예학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더욱 고조되었다고 보여진다. 특히 그는 어려서 {가례}를 받아 공부를 하면서도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함을 근심하여 친우인 신의경과 함께 오랜 동안 강론하고 또 스승인 구봉에게 질문하고 다른 유학자들과의 학문적 교류를 통해 그 대체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렇게 볼 때, 사계의 예학에 대한 관심의 전환은 일차적으로 사계 자신의 예학적 필요와 깊은 탐구열에서 비롯되었다 할 것이다. 이는 그의 생애에서 예학에 대한 탐구가 초년부터 만년에 이르기까지 일관되어 있음에서도 입증되는 바 있다. 그의 나이 36살 때(1583) 스승인 구봉은 사계가 예학에 큰 진보가 있음을 알고 탄복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 해 친우인 신의경의 {喪禮備要}를 저본으로 하여 이를 보완 {상례비요}의 완성을 보았다. 이것이 그의 최초의 예서 저술이다. 또 52세 때(1599)에는 {家禮輯覽}을 완성하였고, 71세 때(1618)에는 영남예학의 대가였던 寒岡 鄭逑에게 예설을 質正하여 학술적 대화를 나누었으며, 77세 때(1624)부터는 인조반정 초의 國家典禮 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였다. 그리고 평소 문인, 친우들과 더불어 예에 대해 의심나는 부분을 강론하고 물음에 대답한 것을 기록한 {疑禮問解} 8권을 만년에 냈으니, 그의 예학에 대한 연구와 활동은 가히 전 생애를 거쳐 일관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사계에 있어 '성리학에서 예학에로'의 관심 전환은 무엇보다 자신의 학문적 취향 내지 관심에서 연유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사계의 예학에 대한 관심 전환은 도학적 사명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된다. 다음 송시열이 사계의 문묘종사를 위해 올린 상소문은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주자가 禮書를 證定하다가 반도 못 이루고 죽게 되매, 勉齋가 이어서 이루려 했으나 稟證하기에 미치지 못한 것이 있어, 이른바 천고에 한이 되는 일이더니, 文元公 臣 金某가 程朱의 학문을 文成公 李珥에게서 얻어서 이미 그 학설을 다 이어 받았고, 마음속에 증험하고 몸소 행하여 晩年에 오로지 예서에 뜻을 두었으니, 대개 면재가 쓴 예서에 감개스러움이 있지만,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이 없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사계는 {가례집람} 서문에서 "주자가 만년에 뜻을 둔 것은 오직 禮書에 있었으니, 후학은 마땅히 여기에 더욱이 마음을 다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볼 때, 사계는 {가례}가 주자에 의해 다시 교정을 보지 못한 아쉬움이 있고, 또 주자 자신도 만년에 뜻을 둔 것이 예서 연구였음을 밝히고, 이를 계승해 예학의 미비점을 보완하는 것이 자신의 도학적 사명이라고 인식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스승인 율곡이 '博文'에는 능하나 '約禮'에는 부족하다는 인식하에서, 율곡이 未至處로 남겨 둔 '約禮'의 과업을 계승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볼 때, 사계는 주자와 율곡에게 있어 남겨진 과제였던 예학을 도학적 사명으로 인식하고 이를 평생의 과제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사계의 입장에서 보면 성리학적 과제는 주자나 율곡에 있어 어느 정도 이룩되었다고 생각하고, 주자나 율곡에게 있어 미진한 분야라고 생각한 예학을 자신의 평생과제로 삼았던 것이다. 이는 그의 저술이나 관심이 성리학보다는 예학에 보다 치중해 있음에서도 입증된다.

Ⅲ. 사계의 師承관계와 사상적 연원

학문이나 사상의 형성에 있어서 누구로부터 배웠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학풍의 授受관계가 될 수 있고 또 반대로 스승과는 다른 독창의 길을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계의 경우 사승관계는 분명해 보인다. 즉 그는 13살 때(庚申, 1560년) 龜峰 宋翼弼(1534-1599)의 문하에 나아가 글을 배웠는데, 이에 대한 [연보]의 기록을 보기로 하자.

12월에 어머니에 대한 상복을 벗었다. 구봉 송선생의 문하에서 학문하였다. 이에 앞서 아버지 黃岡公이 尹元衡의 무리에게 미움을 사서 외직으로 축출되어, 선생은 서울에서 할아버지 贊成公이 기르게 되었는데, 어리고 잔약한데다 어머니가 없는 것을 가련히 여겨 항상 슬하에 두고 밖의 스승에게 보내지 않았다. 조금 성장함에 스스로 분발하여 글을 읽고 뜻을 격려하고 세속의 趨向과 좋아하는 것은 일체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처음으로 송구봉에게 從學하여 四書, 近思錄 등의 글을 배우는데 專心으로 연구하고 더욱 부지런히 하여 이로부터 학문이 날로 진취되니, 황강공이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아이의 학문이 이미 이와 같으니 내게 아무런 근심이 없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사계에 있어 초등교육은 구봉 송익필을 통해 이루어졌다. 구봉은 율곡, 우계와 인근에서 함께 성장하며 학문을 탁마해 온 畏友요 동지였다. 그는 礪山人으로 字는 雲長인데, 경기도 고양에서 僉樞에 오른 宋祀連의 3남으로 태어났다. 구봉은 그의 조모 안씨의 신분과 그의 부친 宋祀連이 1521년 辛巳士禍를 일으킨 장본인으로 사림에게 죄를 지음으로써 늘 신분문제가 제기되었다. 徐孤靑은 구봉을 諸葛亮에 비유하였고, 구봉은 精博한 학문에 洞透한 식견을 가졌으며, 나라를 빛낼 만한 문장에다 經世濟民의 재조가 있었지만, 불우한 신분과 黨禍로 귀양살이와 떠돌이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리하여 그 뜻을 조금도 펴보지도 못하고 가난과 불운속에서 세상을 마쳤으니, 斯文의 재앙이 아니며 志士가 분개할 바가 아니냐고 하였다. 그는 성리학과 예학에 조예가 깊었는데, 성리학에 관한 [太極問]과 예설에 관한 [家禮註說]을 썼다.

특히 구봉은 율곡, 우계에 비해 예학에 밝아 사계의 예학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정철, 성혼, 이이 등이 그에게 예에 관해 자문을 구할 만큼 예학에 정통하였고, [家禮註說], [禮問答] 등의 예서를 저술하여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의 예서인 [가례주설]은 16세기말에 성립된 본격적인 가례 주석서 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율곡 스스로도 관직생활을 하느라 일이 많아 古禮를 살피지 않고 급히 {擊蒙要訣}을 만들었기 때문에 옳지 않은 부분이 많다는 것을 시인하면서, 훗날 구봉의 의견을 따라 고치려고 하였으나 세상을 떠남에 허사가 되고 말아 안타깝다고 하였다. 이렇게 볼 때, 구봉은 당대 율곡으로부터 인정받을 만큼 예학의 전문가였던 것이며, 사계는 이로부터 예학적 학업의 기초를 쌓아 '동방예학의 종장'으로 대성했던 것이다.

또한 사계는 청년기의 학문적 수업을 栗谷 李珥(1536-1584)로부터 받았다. 그의 [연보]에 의하면 20살 때 1576년(정묘) 율곡의 문하에 들어가 수업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제 그 내용을 보기로 하자.

율곡 이이 선생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이로부터 聖學의 깊은 뜻을 상세히 듣고 潛心하여 힘써 행하고 자신의 임무를 매우 무겁게 생각하였다. 李 선생이 海西로 돌아감에 곧 따라가 그 문하에 머물면서 전에 배운 것을 익히고 새로 얻은 것을 琢磨하였다. 더욱 예학에 정통하여 節目이 다 갖추어졌고, 크고 작은 일을 모두 거론함에 李 선생이 항상 믿음직하게 여겨 기대가 특별히 깊었다.

여기에서 볼 때, 사계는 율곡으로부터 수업을 받으면서 유학의 본질을 십분 이해하고 자신의 도학적 사명을 투철히 인식하였다. 그것은 "이로부터 聖學의 깊은 뜻을 상세히 듣고 潛心하여 힘써 행하고 자신의 임무를 매우 무겁게 생각하였다'는 말로 입증된다. 그리고 이 때 이미 예학에 정통하여 율곡으로부터 막중한 믿음과 기대가 컸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사계는 "나는 어려서는 배우지 못했고, 弱冠이 되어서 비로소 小學, 四書 및 六經, 程朱의 여러 글들을 읽었다"고 하여, 자신의 학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유가의 제 경전을 두루 섭렵하게 된 것은 바로 20세 이후 율곡의 문하에서 이루어졌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특히 여기에서 사계가 '나는 어려서는 배우지 못했고' 라는 말을 참고해 볼 때 사계의 학문이나 사상형성에 있어서 율곡의 영향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율곡의 가르침을 통해 성학 내지 도학의 깊이를 인식하게 되었고, 자신의 도학적 책무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었다는 말이다.

또한 송시열은 사계의 문묘종사를 위해 올린 상소문에서 김장생은 程, 朱의 학문을 李珥에게서 배워 터득했다 하고, 또 송준길은 사계 諡狀에서 사계는 이미 李文成의 嫡傳을 얻었다고 하였으며, 張維는 사계 신도비명에서 선생의 학문은 본래 율곡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따라서 사계의 율곡에 대한 尊崇은 다음 글에서도 잘 나타난다.

우리 나라의 道統은 圃隱 鄭夢周가 고려말의 끊어진 학문을 倡道하였고, 寒暄堂 金宏弼이 조선조에 이를 계승했으나 微言을 드러내지 못했고, 지극한 道를 暢達하지는 못했으나 靜菴 趙光祖 선생이 誠明의 學으로 君民의 책무를 맡아 조정에 나아가 정치를 베풀어 蔚然히 볼 만 하였으니, 그 遺風과 여운은 백세를 風動할 만한 것이었다. 그 후에 한 두명의 儒賢들이 나와 세상에 이름을 날렸으나 높게 道를 전한 이는 보지 못하였다. 退溪선생은 많은 유현들이 사화를 당한 뒤인데도 능히 유학의 興起를 자신의 책임으로 여기고 경전을 깊이 연구하고 의리를 밝게 해석해 밝히었으며, 일신의 겸양의 덕을 지키면서 來世의 후 학을 깨우쳐 주었으니 그 공이 크다고 이를 만 하다. 明白純粹하고 洞徹無滓하며 眞知實 踐하여 성인의 宗旨를 얻어, 언행에 실증하여 하자가 없고 사업에 시행하여 時宜에 합당하고 出處를 正으로써 하고 進退를 義로써 하여, 성인을 계승하고 미래의 학문을 열어 주는 큰 책임을 맡아 道學의 맥을 무궁하게 하신 이는 오직 율곡선생 한 사람 뿐이시다.

이와 같이 사계는 우리 나라의 道統을 圃隱 鄭夢周로부터 시작하여 寒暄堂 金宏弼, 靜菴 趙光祖, 退溪 李滉을 거쳐 栗谷 李珥로 규정하고 있다. 이들이 각기 역사적 의미가 있으나 明白純粹하고 洞徹無滓하며 眞知實踐하여 성인의 뜻을 언행에 실증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고, 사업에 시행하여 時宜에 합당하고 출처진퇴를 正義로써 하여, 성인을 계승하고 미래의 학문을 열어주는 큰 책임을 맡아 도학의 명맥을 무궁하게 한 사람은 오직 율곡 뿐이라 하였다. 이는 율곡이 정암을 그렇게 자리매김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계는 율곡을 도학적 측면에서 높이 평가하고 존숭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계는 '博文約禮' 이 두 가지는 聖學에 있어 수레의 두 바퀴와 같고 새의 양 날개와 같다고 한다. 그래서 율곡 선생이 항상 이 말을 암송하여 가르쳤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이 생각할 때 율곡은 博文의 공은 가장 많지만, 約禮에 있어서는 오히려 부족하다는 평가를 하고 있다. 이러한 사계의 율곡에 대한 인식에서 '約禮' 라는 과업이 예학의 과제로 나타났던 것이며, 이는 곧 율곡을 잇는다는 도학적 사명감과 일치되었던 것이다. 존경하는 스승 율곡이 미쳐 못 이룬 학문적 과업인 約禮 내지 禮學을 평생의 사명으로 알고 몸소 진력실천 했던 이가 바로 사계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사계의 학문은 일면 구봉을 통해 이루어졌고, 일면 율곡을 통해 이루어졌다. 다만 이들 두 스승의 학문적 영향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뒤에서 검토하기로 한다.

그런데 구봉, 율곡이 사계의 유년기와 청년기의 교육을 맡게 되었던 것은 그의 부친 黃岡 金繼輝(1526 -1582)와의 돈독한 관계에서 비롯되었다. 부친 황강공은 고봉 기대승, 율곡과 매우 치밀한 교우관계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그의 행장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공은.........일찍이 高峰 奇大升과 栗谷 李珥와 더불어 道義之交를 맺어서 일세의 儀表가 되었다. 經世의 재간에 있어서는 공으로서 으뜸을 삼았다. 奇公이 공보다 먼저 죽음에 李公이 공과 더불어 시종 함께 행동하였는데, 매양 조정에서 말하기를 '참으로 정승을 구하고자 한다면 重晦(金繼輝)가 그 사람이다' 라고 하였다.

율곡 선생은 고봉 기대승과 도의로서 사귀었는데, 율곡이 일찍이 일컫기를 重晦는 학식이 다 통하고 깊고 德量이 넓어 경세제민의 일을 맡을 만 하다고 자주 집정대신에게 말하였는데, 마침내 등용되지 않아 識者가 한스럽게 여겼다.

이와 같이 사계의 부친 황강공은 고봉, 율곡과 道義之交를 맺어 매우 친밀한 관계였으며, 經世의 재질이 있어 율곡으로부터 재상의 적임자로 일컬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황강공과 구봉과의 관계는 어떠하였는가? 이에 대한 직접적인 전거는 보이지 않지만 황강공과 기대승, 율곡이 道義之交를 맺어 친밀했고, 또 율곡, 우계가 道義之交를 맺어 평생을 친하게 지낸 바 있으며, 구봉 또한 같은 지역에서 두터운 우의를 지니고 있었다. 이렇게 볼 때, 황강공은 이들 서인 내지 기호유학의 중심인물이라 할 수 있는 율곡, 우계, 구봉과 매우 친밀한 관계였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에 황강공은 김장생을 구봉에게 맡겨 유아기의 교육을 시켰고, 또 구봉은 이를 기꺼이 받아 들여 우리 나라 예학의 큰 인물로 키웠던 것이다.

그밖에 직접적인 가르침은 받지 않았더라도 사계의 학문적 연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로는 牛溪 成渾(1535-1598), 土亭 李之?(1517-1578), 愚伏 鄭經世(1563-1633) 그리고 그의 친우 申義慶(1557-1647)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연보]에 의하면 사계가 1580년 33살 때 坡山으로 우계를 배알한 기록이 있으나, 직접 그의 가르침을 받은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다음 글을 통해 우계에 대한 존경과 흠모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선생이 일찍이 宋文正 時烈에게 말하기를, "나는 율곡에게는 기쁜 마음으로 心服하여 항상 더 할 바가 없다고 여겼으나, 우계에 대해서는 차등적인 생각이 없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계문하의 사람들이 불평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후에 자주 왕래하여 그 氣貌를 살펴보고 그 의론을 들은 후에야 율곡이 도의로서 사귄 이유를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사계는 처음에는 우계의 인품과 학식에 대해 율곡과 차이를 두고 생각해 왔는데, 그 후 자주 왕래하며 氣貌를 살펴보고 그의 말씀을 들은 후에야 비로소 율곡이 도의로서 사귄 이유를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金集과 문인 尹宣擧와의 예문답에서는 사계와 우계간의 학문적 대화와 교류가 있었음을 짐작하는 기록이 보여 주목된다.

이것은 큰 節目이다. 先人(김장생-필자 주)께서 이미 申丈 義慶으로 더불어 講定하시고, 또한 반드시 우계, 율곡 양 선생과 상의하여 확정하시었다.

이렇게 볼 때, 사계의 학문형성에 있어서 비록 율곡이나 구봉에 미치지는 못하더라도 우계의 영향도 전혀 없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의 나이 20살 때(1567) 土亭 李之?을 보령으로 찾아가 배알한 기록이 보인다.

토정 이지함을 보령에 가서 뵙다. 이 때에 토정이 窮民의 생계를 위하여 해변에서 소금을 굽는데, 연기가 눈에 가득하여 사람이 오래 감내할 수 없었으나, 선생은 조금도 얼굴빛을 고치지 아니하고 서로 마주보며 이야기 하다가 날이 저물어 돌아가매, 토정이 바라보며 송별해 말하기를, '참으로 德人이라' 하였다.

이를 통해서 볼 때 사계가 직접적으로 토정의 가르침을 받은 흔적은 없으나, 보령까지 찾아가 인사를 하고 또 토정의 사계에 대한 신뢰와 기대가 컸음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예학적 측면에서 영남의 愚伏 鄭經世의 영향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사계보다 후배였으나 사계는 그를 가리켜 "예학이 퇴계보다 나으며 금일에 있어 더불어 학문을 논할 사람은 이 한 사람 뿐" 이라 하여, 예학적 측면에서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 따라서 그는 문인인 同春堂 宋浚吉을 통해 퇴계와 우복의 영남예학을 접할 수 있었다. {의례문해} 가운데 송준길의 질문이 무려 240건으로 가장 많았는데, 송준길은 장인인 정경세와 퇴계의 예론을 간접적으로 사계에게 소개하고 토론함으로써 사계로 하여금 영남예학과 기호예학이 소통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또한 그의 친우 申義慶은 사계의 예학 연구에 있어 많은 도움을 주고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사계는 {가례집람} 서문에서 일찍이 신의경과 함께 여러 해 동안 {가례}를 강론했다 하였고, {상례비요} 自序에서는 "나의 친구 신의경은 예학에 깊어 일찍이 널리 經籍을 상고하여 그 大要를 살펴 하나의 책을 엮었으니 喪禮備要라 부른다"고 하였다. 이렇게 볼 때, 신의경은 사계의 예학공부에 있어 학문적 동지였음이 분명하고, {상례비요}의 저술과정에서 보듯이 그의 영향이 적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사계의 학문형성에 있어서 직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친 스승은 송익필과 이이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으며, 그밖에도 성혼, 이지함, 정경세, 친우 신의경의 영향 또한 적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Ⅳ. 사상적 연원

1. 예학적 연원

사계는 평생 예학에 진력함으로써 '동방예학의 종장'으로 불리웠다. 그는 평소 문인 및교우들과의 예에 관한 질의 응답을 묶어 {疑禮問解} 8권을 저술하였고, 친우 신의경의 {상례비요}를 저본으로 하여 이를 보완한 {喪禮備要} 1권을 저술하였으며, 주자의 {가례}를 諸家의 설과 자신의 주를 달아 편찬한 {家禮輯覽} 3권을 저술하였으며, 國家典禮의 당면과제였던 服制와 追崇의 문제를 다룬 {典禮問答}을 남겼다. 이러한 그의 저술을 통해 조선 예학은 마침내 학문적 수준을 갖춘 예학이 되었으며, 예학의 학술적 기초를 마련하여 조선조 예학의 일대 宗師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사계의 예학은 한국철학정신사에 있어서 正脈이라 할 수 있으며, 동방예의지국 또는 君子國이라는 본의를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사계의 예학은 민족사에 길이 영향을 주어 사계 沒後의 병자호란 그리고 西勢의 東漸과 구한말 일본의 침략 및 민족수난기에 있어 三學士의 저항정신, 宋尤菴의 春秋大義, 李華西의 자주의리를 통해서 민족자주의식을 고취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런데 사계의 학문관이나 학문하는 차서속에서 우리는 그의 예학적 학풍을 이미 엿볼 수 있다. 사계는 聖門의 旨訣이 博文約禮에 불과하다 하고, 이 둘 가운데 하나만 폐하더라도 학문이 아니라고 하면서, 스승인 율곡은 博文의 공은 많지만 約禮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고 평가하였다. 사계는 이러한 율곡의 約禮라는 과제가 자신의 할 일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또한 우암에 의하면 사계의 학문은 오로지 '確' 한 글자에서 나왔는데, 늘 '直' 한 글자로서 立心의 요체로 삼았다고 하였다. 이 直은 공자, 맹자를 거쳐 주자가 문인들에게 유언한 것이었으며, 또 사계가 우암에게, 우암이 문인들에게 준 유언이었다. 그런데 이 直은 구봉에게 있어 삶의 도요 죽음의 도요 천지를 세우는 도요 고금을 관통하는 도였다. 따라서 사계의 直은 공자, 맹자, 주자에게서 연원하는 것이지만, 가까이는 구봉에 연원하는 것이다. 결국 사계는 이 直의 사상을 계승하여 예학으로 발전시켰던 것이며, 사계 예학의 사상적 근거가 이 直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학문하는 次序를 주자는 {소학}, {근사록}, {대학}, {논어}, {맹자}, {중용}, 六經, 史子의 순으로, 율곡은 {소학}, {대학}, {논어}, {맹자}, {중용}, 五經, 性理諸書의 순으로, 사계는 {소학}, {가례}, {심경}, {근사록},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오경의 순으로 삼았다. 또 구봉과 우계도 {소학}과 {가례}를 매우 중시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볼 때, 사계는 사서 이전에 읽어야 할 필독서로서 {소학}, {가례}, {심경}, {근사록}을 들고 있으며, {소학}은 주자, 율곡, 구봉, 우계, 사계가 모두 공통적으로 학문의 첫 번째 교재로 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소학}이나 {가례}의 중시는 사계의 예학 중시와 일치하는 교학태도로서 주목해야 할 점이다.

그러면 사계 예학사상의 연원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이미 위에서 언급했지만 일차적으로는 주자 {가례}의 보완 필요성과 주자가 만년에 뜻을 둔 것이 예학에 있었으므로, 이 문제의 해결이 후학으로서의 도학적 책임이라는 것과, 사계가 지적했듯이 율곡의 約禮에 대한 미비점과 예학에 대한 不備를 자신이 계승 보완해야 한다는 사계 나름의 道統의식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직접적으로는 구봉과 율곡의 영향이 가장 크다. 이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론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하나는 사계의 예학적 연원을 오직 구봉으로만 보려는 견해가 있고, 또 하나는 구봉과 율곡 양인에 연원을 두려는 견해가 있다.

먼저 사계의 예학적 연원을 구봉과 연관해 보는 논거는 사계가 13살에 구봉의 문하에 들어가 수업을 했고, 구봉의 학문이 특히 예학에 뛰어났다는데 근거하고 있다. 이는 그의 {가례집람} 서문의 다음 글에서도 볼 수 있다.

내가 어려서부터 {가례}를 받아 읽었는데 능히 그 밝게 알지 못함을 병으로 여겨, 친우 申義慶과 몇해 동안 강론하고, 또 師門에 나아가 質正하여 그 대략을 알게 되었다.

여기에서 어려서부터 {가례}를 읽었다는 것은 13세 경 구봉의 문하에서 공부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만 '師門에 나아가 질정하여 그 대략을 알게 되었다'는 말에 대해서는 이를 구봉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율곡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의 문제가 생긴다. 논자의 생각으로는 이 글이 {가례집람}의 서문이고 {가례집람}이 씌어진 시기가 1599년이라면, 율곡은 이미 1584년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구봉으로부터의 지도를 받은 것으로 해석함이 옳다고 생각된다. 또 사계는 36살 때 구봉으로부터 예학에 큰 진보가 있음을 칭찬받은 기록이 보이고, 그의 학문이 {소학}과 {가례}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는데서도 구봉의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사계의 예학적 연원을 구봉에서 찾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율곡의 예학적 연원이 문제가 되는데, 이에 관해 검토해 보기로 하자. 사계가 율곡의 문하에서 예학을 공부한 흔적은 다음 글에서 보인다.

율곡 李 선생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이 때로부터 聖學의 깊은 뜻을 상세히 듣고 마음을 가다듬어 힘써 행하고 자신의 임무를 매우 무겁게 여겼다. 이 선생이 海西로 돌아감에 곧 따라가 그 문하에 머물면서 전에 배운 것을 강구하고 새로 얻은 것을 연마하였다. 더욱 예학에 정통하여 절목이 다 갖추어졌고 크고 작은 일을 모두 거론함에 이 선생이 항상 믿음직하게 여겨 특별히 기대하였다.

여기에서 사계가 율곡의 문하에 머물면서 예학에 정통하여 절목이 다 갖추어졌고 크고 작은 일을 모두 거론함에 율곡선생의 신뢰와 기대가 컸다는 말은 사계의 예학형성에 있어 율곡의 영향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또 {의례문해속}에서의 김집과 윤선거와의 예 문답에서도 사계예학의 율곡적 연원을 짐작케 한다.

이것은 큰 절목이다. 先人(김장생)께서 이미 申丈 義慶으로 더불어 講定하시고, 또한 반드시 우계, 율곡 양 선생과 상의하여 확정하시었다.

여기에서 사계는 예설의 정립에 있어서 먼저 친우인 신의경과 토론과정을 거치고 반드시 우계, 율곡 양 선생과 상의하여 확정지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그의 {의례문해}에 율곡의 예설이 20여회나 거론되고 있고 특히 사계가 율곡의 예설을 尊信하고 있음에서도 율곡의 예학적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이미 언급했듯이 사계는 스승인 율곡이 博文에는 탁월하나 約禮에는 부족하다고 인식하였으며, 나아가 율곡이 못다 한 '約禮'의 과업을 계승하는 것이 자신의 道統的 책무라고 깨달았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사계의 예학형성에 있어 율곡의 영향을 전혀 배제키는 곤란할 것이다. 따라서 사계 예학의 사상적 연원은 구봉에 주로 있다 하겠지만 율곡의 영향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2. 성리학적 연원

사계의 학은 예학이 주류가 되겠지만 성리학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는 13살 때 구봉에게서 {근사록}을 받아 수업했으며, 그의 문인인 우암을 만났을 때에도 {근사록}으로 시작하여 가르쳤다. 또 51살에 {近思錄釋疑}를 완성할 때까지 평생 이에 대한 연구가 매우 깊었다. {근사록}은 성리학의 필독서로서 사계가 이를 얼마나 중시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또 71살 때 {經書辨疑}를 완성하였고, 76살때에는 韓嶠에게 [四端七情辨]을 지어 보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사계는 일면 예학에 전념하면서도 성리학적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적극적인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면 사계의 성리학 형성에 영향을 주고 받은 요인들은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 검토해 보기로 하자.

우선 주자에 대한 그의 尊崇을 지적할 수 있다. 그는 말하기를 만약 주자가 없었다면 요, 순, 주공, 공자의 도가 어둡게 되었을 것이라 하고, 비록 二程이 경전을 해석하였으나 의심할 곳이 많고 또 따르기 어려운 곳이 있었다 한다. 그리고 율곡의 "내가 다행이도 주자뒤에 태어나 학문이 거의 그르치지 않게 되었다"는 말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사계도 주자의 성리학적 공헌을 인정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에 대한 존숭이 매우 깊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율곡적 연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사계는 20살 때 율곡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게 되었는데, 이 때부터 聖學의 깊은 뜻을 상세히 듣고 沈潛하여 힘써 행하고 자신의 임무를 매우 무겁게 생각하였다 한다. 그는 또 {經書辨疑} 서문에서 어려서는 배우지 못했고, 弱冠이 되어서 비로소 {소학}, 사서 및 六經, 程朱의 여러 책 등을 읽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서 볼 때, 사계의 학문이 본격적으로 들어서고 聖學의 진수를 파악하기 시작한 것은 20세 이후 율곡의 가르침을 받고 부터인 것으로 생각된다. '어려서는 배우지 못했고...' 라는 말을 미루어 보면 사계에 있어서 유년기 내지 소년기의 공부는 그의 사상형성에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사계의 성리학 형성에서 율곡의 영향이 어떠했느냐 하는 문제는 약간의 이견이 존재한다. 대체로 많은 사람들이 예학은 구봉에게서 배웠고 성리학은 율곡에게서 배웠다는데 동의하고 있다.

이제 사계의 성리학이 율곡에 연원하고 있는 바를 구체적으로 검토해 보기로 하자. 사계의 理氣論은 기본적으로 율곡의 설을 계승하고 있다. 그것은 理氣二元의 존재관, 理氣의 개념 설명, 氣發理乘一途說과 理通氣局說에 동의하고 있고, 理氣之妙의 사유를 특히 강조하는면에서 더욱 그렇다. 또 사단칠정론에 있어서도 율곡의 '七包四'의 논리를 수용하고 있는 점, 사단칠정이 모두 '氣發理乘'의 구조라는 점, 사단칠정이 모두 발하는 것은 氣요 발하는 所以가 理라고 보는 점, 사단의 不中節을 인정하고 있는 점 등이 율곡과 궤를 함께 하는 것이다. 다만 사계가 율곡의 人心道心相爲終始說에서 도심의 인심화를 반대하고 율곡과는 달리 인심을 곧 인욕으로 보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사계 나름의 견해에 속한다. 또 그는 율곡이 {중용}의 '費而隱'의 費를 理의 用이라 하고는, 정철이 九容을 所當然의 측면에서 理의 用으로 보는 것을 용납하지 않은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것은 사계가 스승의 설에 무조건 따르지 않고 성리의 정밀한 분석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으로 그의 학문적 자주성이 돋보인다. 혹자는 사계가 理를 절대시하고 사단과 도심을 절대시했으며, 또 理氣不相離의 관점에만 서 있다는 점에서 그의 성리학적 특성을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는 재고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볼 때, 사계의 성리학에 있어서 그 학문적 연원은 주자를 거쳐 율곡에게 있었다고 보아야 하겠다. 다만 구봉이 예학만 한 것이 아니라 {太極問}을 지을 만큼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고, 또 13살 때 사계가 구봉으로부터 四書와 {近思錄}을 배웠다고 볼 때, 구봉의 성리학적 영향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Ⅴ. 결어

이상의 논구를 요약 정리함으로서 결론을 삼고자 한다. 사계에 있어 '성리학에서 예학에로'의 관심이 전환된 배경은 역사적 배경보다도 사계 자신의 예학에 대한 향학열과 도학적 사명의식을 주 요인으로 꼽을 수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예학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더욱이 예학의 대가였던 구봉의 문하에서 예학에 대한 향학열이 더욱 고조된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주자 {가례}에 대한 不備의 인식과 주자 만년의 학문적 관심이 예서에 있었다는 생각에서, 주자가 못다 한 예학적 과업을 계승해야 한다는 신념이 자리하고 있었다. 또 스승인 율곡이 '博文'에는 능하나 '約禮'에는 부족하다는 인식하에서, 율곡이 못다 한 '約禮'의 과업을 계승하고자 하였다. 즉 주자와 율곡이 남겨 둔 예학적 과업을 자신이 계승하겠다는 도학적 사명의식이 사계로 하여금 평생을 예학연구에 전념하게 하고 성리학에서 예학에로 방향전환을 하게 된 주된 배경이었다.

사계의 사승관계를 통한 사상적 연원은 13살 때 구봉 송익필의 문하에 들어가 수업을 받았고, 20살 때 율곡 이이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사계가 당대 기호유학의 중심인물이었던 구봉, 율곡의 문하에서 성리학과 예학을 공부하게 된 것은 그의 부친 黃岡 金繼輝와 이들과의 학문적 교류와 돈독한 우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들 외에도 우계 성혼, 토정 이지함은 사계의 존숭이 컸고 또 학문적 영향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우복 정경세는 영남예학을 동춘당 송준길을 통해 사계에게 소개함으로써, 사계로 하여금 기호예학과 영남예학이 소통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주었으며, 그의 친우 申義慶 또한 사계의 예학공부에 있어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주고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다음 사상적 연원은 예학적 연원과 성리학적 연원으로 구별해 볼 수 있다. 사계의 예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이는 구봉이며, 율곡 또한 이에 미치지는 못하나 어느 정도의 영향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계의 성리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이는 율곡이다. 그것은 그의 理氣二元의 존재관, 理氣의 개념설명, 氣發理乘一途說, 理通氣局說에 대한 동의, 理氣之妙의 사유 등에서 알 수 있고, 사단칠정론에 있어서도 율곡의 '七包四'의 논리를 수용하고 있고, 사단칠정이 모두 氣發理乘의 구조로서 발하는 것은 氣요 발하는 所以는 理라는 점, 사단의 不中節을 인정하고 있는 점 등이 율곡과 궤를 함께 하는 것이다. 다만 사계가 율곡의 人心道心相爲終始說에서 도심의 인심화를 반대하고 인심을 곧 인욕으로 보는 것은 사계 나름의 견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사계의 성리학에 있어서 그 학문적 연원은 주자를 거쳐 주로 율곡에게 있었다고 볼 수 있지만, 구봉의 영향 또한 전혀 배제키는 어려울 것이다.

{經書辨疑·大學}의 분석을 통해 본 沙溪 經學의 特徵과 그 經學史的 意味

이 영 호

(성대 대동문화연구원 박사후연구원)


<목 차>




Ⅰ. 序論

Ⅱ. {經書辨疑·大學}의 분석을 통해 본 沙溪 經學의 特徵

Ⅲ. 마무리 -沙溪 經學의 經學史的 意味-



Ⅰ. 序論

金長生(1548∼1631)의 본관은 光山이며, 자는 希元, 호는 沙溪이다. 아버지는 대사헌과 한성좌윤을 역임한 黃岡公 繼輝(1526∼1582, 자는 重晦, 호는 黃岡)이며, 어머니는 平山 申氏로 右參贊을 지낸 瑛의 따님이다. 부친인 黃岡公은 新進士類로서 학문과 덕망이 뛰어나, 당대의 名士인 沈義謙·朴淳·奇大升·李珥·成渾·鄭澈 등과 친교를 맺고 있었다. 후일 사계가 栗谷을 師事하고 수제자가 된 것은 부친인 황강공의 교유관계에서 비롯되었다. 사계는 율곡 외에 龜峰 宋翼弼을 사사했지만, 과거에는 응하지 않고 處士로서 학문에만 매진했다. 그러다가 그의 나이 31세가 되던, 1578년(선조 11년)에 처음으로 이조의 啓請에 의해 종9품인 昌陵 參奉을 시작으로 敦寧府 參奉과 정산 현감 등을 거쳤으며, 1610년(광해군 2년)에 철원 부사를 역임하였다. 1613년(광해군 5년)에 이른바, 癸丑獄事에 연좌되어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仁祖反正(1623년)에 이르기까지 10년 동안 향리에 은거하면서 저술과 강학에 힘썼다. 인조반정 이후 형조참판에 이르기까지 여러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고사하였다. 그러나 사계는 반정 이후 西人의 영수격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인조 초반의 정국을 서인으로 안착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이후 세상을 뜨기까지 西人의 山林으로서 정국에 강한 영향력을 드리우는 한편, 宋時烈·宋浚吉·李惟泰·趙翼·崔鳴吉 등 많은 명사들을 제자로 길러냈다.

沙溪는 13권 6책의 {沙溪文集}과 {家禮輯覽}·{典禮問答}·{疑禮問解}·{近思錄釋義}·{經書辨疑} 등의 저술을 남겼다. 이러한 저술에 녹아있는 사계의 학문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栗谷 李珥의 嫡傳을 이어 尤庵 宋時烈에게 전해 준 조선 주자학의 태두로서, 畿湖學派의 定礎者'이며, 그의 학문의 중심은 禮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에 걸맞게 사계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그의 예학사상에 편중되어 있으며, 경학에 대한 연구는 매우 미미하다. 그가 남긴 경학저술이 경학사적으로 의미를 찾을 수 없다면, 이러한 기존의 연구 경향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고찰한 바로는 사계의 학문은 예학에 있어서 뿐만이 아니라, 경학에 있어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룩해 내었다. 특히 그의 저술 중, 癸丑獄事 후 은거시에 저술한 {經書辨疑}는 조선조의 주자학적 경학 방면에 있어서 매우 주목할 만한 성과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저술을 통해 사계 경학의 특징과 그 경학사적 위치를 가늠하고자 하는 시도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 매우 아쉽다. 이에 본고에서는 {경서변의}의 분석을 통하여 사계 경학의 특징과 그 경학사적 의미를 짚어 보고자 한다. 그런데 {경서변의}는 여러 경전에 대한 辨疑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 모두를 그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자칫 논의의 초점을 흐리게 하거나, 표면적인 분석에 그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經書辨疑·大學}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사계 경학의 특징적인 면모를 짚어보고 나서, 이를 바탕으로 사계 경학의 경학사적 의미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에서 굳이 {經書辨疑·大學}을 대상으로 삼은 이유는, {대학장구} 자체가 宋明理學史에서 중심적인 위치에 자리한 경전일 뿐만 아니라, 사계의 경학세계에서도 {대학장구}에 대한 변의를 토대로 쓰여진 {經書辨疑·大學}이 그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Ⅱ. {經書辨疑·大學}의 분석을 통해 본 沙溪 經學의 特徵

{經書辨疑·大學}은 朱子의 {大學章句}와 {大學或問}을 바탕으로 하여 辨疑를 하였기 때문에, {大學}의 經學的 문제-章句改定·錯簡說·闕文說·誤字說·作者說·著作時期說·明德說·格物說 등-에 있어서는 거의 朱子의 설을 준수하고 있다. 하지만 단순히 주자의 註를 준수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朱子와 朱子學派의 經說-이른바 小註-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을 辨疑를 통해 이룩해 내었는데, 후술하겠지만 이 변의에 동원된 형식은 사계 이후 주자학적 {大學}해석의 한 전형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또한 그 내용을 고찰해 보면, 주자학의 주요 범주에 대한 선배 諸儒의 의견과 沙溪 자신의 견해가 제시되어 있어, 사계의 주자학에 대한 심층적 이해를 엿볼 수 있다. 이에 {經書辨疑·大學}을 분석함에 있어서, 朱子註와 小註에 대한 사계의 辨疑를 분석하고 나서, 사계의 朱子學에 대한 深層的 理解가 {經書辨疑·大學}에 어떻게 용해되어 있는 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1. 朱子註와 小註에 대한 辨疑

{經書辨疑·大學}의 전체적인 구성은 朱子의 {大學章句}와 朱子의 註에 위배되지 않는 후대 性理學者들의 학설로 疏를 단 {大學章句大全}(이른바 小註)에 대한 辨疑로 이루어져 있다. 우선 사계의 朱子註에 대한 辨疑를 살펴보고 나서 小註에 대한 辨疑를 고찰해 보기로 하겠다.

(1) 朱子註에 대한 辨疑

朱子가 {大學}을 개정하여 {大學章句}를 저술하자, 중국과 조선의 많은 학자들이 {大學章句}에 대해 異議를 제기하였지만, 사계는 주자의 주에 대하여 거의 절대적인 尊信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經書辨疑·大學}에서도 朱子註에 대하여 異議를 제기하기보다는, {大學章句}의 주자해석이 불분명하거나 前後 언급이 다른 부분에 대하여 분석·설명하고 있다. 또한 주자가 경문의 구절 중 주석을 내지 않은 부분에 대하여 보충을 하기도 한다. 때문에 사계의 이같은 辨疑는 朱子註에 대한 또 다른 疏, 즉 小註의 역할을 하고 있다. 먼저 {大學章句}의 주자해석이 불분명하거나 전후 언급이 다른 부분에 대한 沙溪의 辨疑를 살펴보고자 하는데, 이는 본질적으로 朱子註의 本義에 대한 探索이라고 할 수 있다.

주자는 자신의 사상체계에 의하여 {大學}의 원문을 재배치하고, 그의 논리상 傳五章이 缺落되었다고 하여 補亡章을 지어 넣었다. 그런데 주자의 이러한 {大學}의 재해석은 매우 논리적임에도 불구하고, 그 讀法에 따라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그래서 주자의 {大學章句} 이후, 주자 해석의 불분명한 부분에 대하여 그 本義를 찾고자 하는 시도가 朱子註에 대한 疏의 형태로 中國 {大學}解釋史에 존재해 왔었다. 沙溪 또한 {經書辨疑·大學}에서 朱子註의 本義에 대한 探索을 하고 있는데, 주로 {大學章句大全}에서 설명해 놓은 朱子註의 疏에 대한 批判을 통해 그 本義를 파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經書辨疑·大學}, 傳五章補亡. '小註已知∼莫不有知之知'條

{大學章句大全}(小註) : "'已知'는 윗 문장의 '人心之靈, 莫不有知'의 '知'이다."

{經書辨疑·大學} : 나(沙溪-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人心之靈, 莫不有知'의 '知'는 本然의 知로서 知體이며, '已知'의 '知'는 곧 '致知'의 '知'로써 知用이다. 주자의 뜻은, '致知'의 방법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미루어 그 알지 못하는 것에 미쳐서 그 지극함을 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上下의 '知'자는 저절로 같지 않으니, 小註의 설은 의심할 만하다."

주자는 {大學章句}의 傳五章 補亡章에서, "人心의 영특함에는 ⓐ앎이 있지 않음이 없고, 천하의 만물에는 이치가 있지 않음이 없다. …… 반드시 배우는 자는 천하의 만물에 나아가 그 이미 ⓑ알고 있는 이치로 인하여 더욱 窮究하여 그 極에 이르지 않음이 없어야 한다(蓋人心之靈莫不有ⓐ知, 而天下之物莫不有理. …… 必使學者卽凡天下之物, 莫不因其已ⓑ知之理而益窮之, 以求至乎其極)."라고 하였는데, 小註에서는 ⓑ의 已知의 '知'가 ⓐ의 '知'와 같다고 해석하였다. 이에 대해 사계는 인간의 知를 體와 用으로 구분하고 있다. 즉 ⓐ의 지는 先天的으로 구비하고 있는 인식능력으로서 '知體'라고 한다면, ⓑ의 지는 ⓐ의 지의 인식활동에 의해 얻어진 결과로서의 知識에 불과한 '知用'인 것이다. 그러므로 補亡章의 '莫不因其已知之理'라는 구절에 대한 小註의 해석은 잘못된 것이며, 上下의 '知'字를 體用으로 나누어 이해하는 것이 주자의 본래 의도에 가깝다는 것이다. 주자주의 본의에 대한 이러한 탐색은 朱子註의 한 글귀를 놓고 어떤 각도에서 파악하느냐의 문제이다.

그런데 朱子註의 보다 더 큰 문제는 주자 자신이 동일한 내용에 대하여 다르게 주석을 해 놓은 경우로서, 후일 이같은 朱子註의 異同에 관한 문제는 中國과 韓國의 朱子學의 展開에 있어서 큰 관심사로 등장한다. 沙溪 또한 일찍이 朱子說의 이러한 異同에 대하여 주목을 하고 있다.

{經書辨疑·大學}, 傳九章, '如保赤子'條

林隱 程復心의 {四書章圖}에 "이 구절은 {大學集註}와 {大學或問}이 다르다"고 하였는데, 아래 {經書辨疑·或問}에 자세하게 보인다.

{經書辨疑·大學或問}, 傳九章, '如保赤子'條

程復心의 {四書章圖}에서, "이 구절은 {大學集註}에서는 朱子가 후에 고쳤으나, {大學或問}에서는 고치지를 않았다"고 하였다.

{大學章句} 傳九章인 齊家治國章에서 齊家治國의 요체는 爲政者가 孝弟慈를 행하고 이를 나라 안에 미루어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朱子는 {大學章句}의 註에서는 孝弟慈에 대하여 모두 언급을 하였지만, {大學或問}에서는 위정자의 慈에 대해서만 논의를 하고, "그 細目으로서의 慈를 언급하면 큰 조목인 孝弟는 저절로 알 수 있다(旣擧其細, 則大者, 可知矣)."고 하였다. 이에 대해 {大學或問} 小註에서 三山陳氏가 "慈를 언급하면, 孝弟는 그 안에 저절로 보인다(擧慈, 可以見孝弟矣)"라고 하여, 朱子의 해석을 부연하고 있다. 그런데 沙溪는 {大學章句}와 {大學或問}의 주자의 해설이 다른 것에 대한, 朱子의 註와 三山陳氏의 해설에 대하여 수긍을 하지 못한 듯 하다. 그러다가, 元代 程復心(1257∼1340, 자는 子見, 호는 林隱)의 {四書章圖}를 보고는 의문을 풀게 되었다. 즉 {大學章句}는 {大學或問}에 비해 뒤늦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齊家治國의 요체로 孝弟慈를 병칭한 {大學章句}의 설이 주자의 정론이라는 것이다. 이는 물론 사계의 독창적인 견해가 아니라 원대 학자인 정복심의 설을 인용한데 불과하지만, 朱子註의 異同에 대한 沙溪學派의 최초의 經學的 관심이었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

이상으로 우리는 沙溪의 朱子註의 本義에 대한 탐색을 살펴보았다. 지금부터는 주자주에 대한 사계의 보충을 고찰해 보기로 하자. 사계의 주자주에 대한 보충은, 經文에 대한 朱子의 주석이 불충분한 부분에 대하여 보충을 하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朱子註의 難解處에 대하여 보충설명을 하기도 한다. 다음의 예문을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① {經書辨疑·大學}, 經一章, '明明德於天下註,∼明其明德也'條.

朱子는, "體用의 완전함을 극진히 하여, 한 마디 말로 표현한 것이다"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栗谷은, "자신의 덕을 밝히는 것은 體요, 백성들의 덕을 새롭게 하는 것은 用이다. 천하에 밝은 덕을 밝히는 것은 體와 用을 합하여 말한 것이다"고 하였다.

② {經書辨疑·大學}, 傳三章, '註?錫'條.

'?'는 {四聲通解}에 銅鐵을 가는 기구라고 되어 있다. '錫'은 아마도 '?'자인 것 같으니, {四聲通解}에 '??'이라고 되어 있다. 이 '?'은 아마도 오늘날의 '邊?'이 아닐까 한다.

먼저 ①의 인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주자는 {大學章句}의 經文 중, "明明德於天下"에 註를 내면서,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그 明德을 밝히게 한 것이다(天下之人, 皆有以明其明德也)."라고 하고, {대학혹문}에서 "(이 구절은) 本體와 作用의 전부를 극진히 하여, 한 마디 말로 표현한 것이다(極其體用之全, 而一言以擧之)."라고 보충을 하였다. 이는 '明明德於天下', 즉 平天下의 이념에는 儒學(구체적으로 朱子學)의 본질과 작용의 전체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는 의미이다. 이에 대하여 沙溪는 朱子의 설을 인정하는 가운데, 스승인 栗谷의 견해를 인용하여, 本體에 明己德을 作用에 新民德을 分屬시킨다. 沙溪의 이러한 보충은, '爲己'정신의 바탕 위에 '爲人'을 고려하는 유학적(주자학적) 사유를 충실하게 계승한 것으로서, 주자의 {대학}주석-{大學章句}와 {大學或問}-의 불충분한 부분에 대한 補完의 성격을 띄고 있다.

다음 ②의 경우를 살펴보기로 하자. 주자는 {大學章句} 傳三章의 '如切如磋'를 주석하면서, "(물건을) 가는 것은 줄과 대패로 한다(磋以?錫)."라고 풀이를 하였다. 사계는 주자의 이 주석에 대해 崔世珍(?∼1542, 자는 公瑞)이 지은 韻書인 {四聲通解}를 인용하여 '?'를 '銅鐵을 가는 기구'라고 풀이를 한다. 그리고 '대패'를 의미하는 글자가 '錫'자로 쓰여 있는데, 이를 '?'자로 바로 잡고 당시 쓰이던 '邊?'으로 추정하였다.

사계의 주자주에 대한 보충은, 이처럼 주자의 주석이 미진한 부분에 대한 보충과 주자주 자체에 대하여 풀이와 고증을 해 놓은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계는 위와 같이 주자주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주자주에 달려있는 {大學章句大全}의 疏, 즉 小註에 대해서도 매우 자세하게 분석을 하여 이에 대하여 辨疑를 하고 있다.

(2) 小註에 대한 辨疑

沙溪의 {大學章句大全}의 疏, 즉 小註에 대한 辨疑는 小註의 批判과 小註에 대한 풀이로 구성되어 있다. 그 예를 들면서 간략하게 고찰해 보기로 하자.

① {經書辨疑·大學}, 傳五章補亡, '小註, 玉溪盧氏∼理之體也'條.

{大學章句大全}(小註) : 小註에서 玉溪盧氏는, "겉(表)과 조잡(粗)한 것은 理의 用이고, 안(裏)과 정밀(精)한 것은 理의 體이다"고 하였다.

{經書辨疑·大學} : 栗谷이 이에 대해 論駁하기를, "禽獸·똥·흙에 있는 理는 겉도 조잡하고 안도 조잡하니, 萬物을 表裏와 精粗에 따라 體用으로 二分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栗谷先生의 말씀이 그럴 듯하나, 先賢의 '理에는 精粗가 없다'는 說과는 다르니, 어찌된 것입니까?"라고 물으니, 나(沙溪-필자)는, "'理에는 精粗가 없다'는 말은, 본시 精粗에 상관없이 모두 理가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율곡 선생이 말씀하신 뜻은, '理가 精密한 곳에 있으면 表裏가 모두 精密하고 (理가) 粗雜한 곳에 있으면 表裏가 모두 粗雜하다'는 것이니, 각각 當然한 바가 있다는 말씀이다"고 대답하였다.

② {經書辨疑·大學}, 傳三章, '瞻彼淇澳, 小註, 詩之六義'條.

{二程全書}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詩에는 六義가 있다. '風'은 風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요, '賦'는 그 일을 아뢰는 것이다. '比'는 直接比喩이니 '溫其如玉'과 같은 시구가 이에 해당되고, '興'은 物에 의해 興을 일으키는 것이니 '關關雎鳩'·'瞻彼淇澳'과 같은 구절이 이에 해당된다. '雅'는 正道를 端雅하게 말한 것이니 '天生烝民, 有物有則'과 같은 시구가 이에 해당되며, '頌'은 美德을 稱頌한 것이니 '有斐君子, 終不可?'과 같은 구절이 이에 해당된다."

{大學章句} 傳五章에서 주자는, "(이치를 窮究하는) 힘쓰기를 오래해서 하루 아침에 豁然히 관통함에 이르면, 모든 사물의 表裏와 精粗가 이르지 않음이 없고, 내 마음의 全體와 大用이 밝지 않음이 없다(至於用力之久而一旦豁然貫通焉, 則衆物之表裏精粗, 無不到, 吾心之全體大用, 無不明矣)."고 하였다. ①의 小註는 '表裏精粗'에 대한 玉溪盧氏의 풀이로써, 그는 表·粗를 理의 作用으로 裏·精을 理의 本體로 해석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栗谷과 沙溪는 만물의 理를 表裏精粗에 따라 體用으로 二分하는 玉溪盧氏의 설을 비판하고, 精한 것이든 粗한 것이든 그 속에는 모두 本體로서의 理가 깃들어 있다고 주장한다.

②는 주자의 주에 대한 疏, 즉 小註에 대하여 그 의미를 敷衍해 놓은 것이다. 주자는 {大學章句} 傳三章의 "저 기수 모퉁이를 돌아보니, 푸른 대나무가 무성하구나!(瞻彼淇澳, 菉竹??)."라는 본문에 대하여, "이 시는 興體이다(興也)"라고 주를 달았는데, 이에 대해 新安陳氏는 "이 詩는 詩의 六義 중 興體에 속하는 것으로서 淇水의 대나무를 빌어서 詩想을 일으킨 것이다. …… (此於詩之六義, 屬興, 借淇竹起興. …… )"라고 풀이를 하였다. 이에 沙溪는 新安陳氏가 붙인 小註에 대하여, 程子의 설을 인용하는 가운데 六義의 개념과 실례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는 {大學章句}本文→朱子註→朱子註에 대한 疏(小註)→小註에 대한 敷衍의 과정을 거친 것으로서, 朱子學派의 {大學}說에 대한 꼼꼼한 글읽기를 의미한다. 이상으로 우리는 {經書辨疑·大學}의 構成에 대하여 朱子註에 대한 辨疑와 小註에 대한 辨疑로 나누어, 그 예를 하나씩 들어가면서 고찰해 보았다. {經書辨疑·大學}의 이러한 構成은, 실제로 {經書辨疑} 전체에 적용될 수 있는 형식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經書辨疑·大學}의 내용은 어떻게 짜여져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겠다.

2. 朱子學의 주요 범주에 대한 深層的 分析

{經書辨疑·大學}의 내용은, 朱子學의 三大範疇인 理氣論·心性論·格物論에 대한 沙溪의 심층적 분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분석에 있어서 중국 주자학자들보다 조선 주자학자들의 설-특히 栗谷의 설-을 많이 인용하고 있으며, 최종적으로 沙溪 자신의 비판적 분석과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1) 理氣論

{經書辨疑·大學}에 나타난 沙溪 理氣論의 특징은, 退溪의 理氣說에 대한 비판과 栗谷의 理氣說에 대한 계승 발전이다. 주자의 理氣論은 '一而二 二而一'로서 理氣의 不相雜과 不相離를 동시에 말하였다. 그런데 퇴계는 주자의 이러한 학설을 수용함에, 不相離(二而一)보다는 不相雜(一而二)을 중시하여 理와 氣를 둘로 나누어 보는데 치중했다. 퇴계의 이러한 경도는 필연적으로 '理와 氣는 서로 발동한다'는 '理氣互發說'의 결론에 이르게 된다. 사계는 퇴계의 이러한 이기설에 대하여 비판을 가하고 있는데, 北溪 陳氏의 小註에 대한 辨疑를 통해 간접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經書辨疑·大學}, 經一章, '在明明德小註∼所以虛靈'條.

陳北溪는, "天地의 理를 얻고, 또 天地의 氣를 얻어 바탕(質)을 형성한다"고 하였다. 이 말대로라면 사람이 質을 이루기 전에는 理와 氣가 서로 떨어져 있다가, 바탕을 형성한 뒤에야 다시 합하여 하나가 된다는 것이니, 이는 주자의 말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 栗谷의 말은 본래 理와 氣를 하나로 여기는 것이 아니지만, 또한 둘로 여기는 것도 아니다. '이와 기는 원래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니,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이다'라는 언급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 理와 氣를 둘로 여긴다면, 各自의 發動을 인정하는 것으로 이는 바로 退溪의 理氣互發의 학설이다.

北溪 陳氏는 "인간은 태어날 때에 天地의 理와 天地의 氣를 얻게 되는데, 이때 理氣가 합해져서 虛靈한 本性이 생긴다(人生得天地之理, 又得天地之氣. 理與氣合, 所以虛靈)."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沙溪는, 북계 진씨의 이같은 說이 理氣를 각기 一物로 여겨 분리하여 보는 시각이 강하기 때문에 朱子의 '理氣, 不相離不相雜'의 원칙에 어긋나는 그릇된 학설이라고 주장한다. 주자가 말하는 하나도 아니면서 둘도 아닌 것으로 존재하는 理氣는, 율곡이 말한 바, "이와 기는 원래 서로 떨어져 있지 않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존재(理氣, 元不相離, 一而二, 二而一)"이다. 그러므로 理와 氣를 둘로 나누어 보는 북계 진씨의 설은 理氣의 各自 發動을 인정하는 것이니, 이는 退溪의 理氣互發說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사계가 생각하는 理氣의 존재형태와 현실 세계로의 발현양상은 어떠한 것인가?

① '妙合'이란 것은, 理氣가 본래 混融無間하다는 것이다. '凝'이란 것은,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니, 人物을 生成시키는 것을 말함이다.

② 發現하는 것은 氣이고, 발현시키는 원리는 理이다. 그러니 氣가 아니면 발현할 수 없고, 理가 아니면 발현시킬 것이 없다.

일찍이 周濂溪는 "無極之眞, 二五之精, 妙合而凝"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無極의 眞은 理를, 二五의 精은 陰陽五行의 氣를 의미한다. 이에 사계는, ①에서 周濂溪가 理와 氣의 존재형태를 '妙合'이라고 한 것에 대하여, "理와 氣는 본래 混融하여 간격이 없다(理氣本混融而無間也)"라고 풀이한다. 그리고 이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즉 混融無間하게 존재하는 理氣가 凝聚하여 人과 物을 生成시키는 작용을 '凝'이라고 해석하였다. 이같은 해석은, 퇴계가 이 문구에 대하여, "眞이니 精이니 말한 것은 그것이 二物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妙合而凝'이라 한 것이다. 만약 그것이 一物이라면, 어찌 '妙合而凝'이라 하였겠는가?"라고 풀이한 것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 동일한 문구에 대하여, 沙溪는 混融無間한 상태인 理氣를 말한 반면에, 退溪는 決是二物로서 존재하는 理氣를 강조한다. 그러므로 사계에게 있어 妙合되어 있는 理氣가 凝聚하여 人物을 생성시키는 '凝'의 개념도, 퇴계에 있어서는 단순히 二物인 理氣가 합해져 있는 妙合을 敷衍하는 부가어로 그 의미가 약화된다. ②는 理氣가 현실에 발현되는 양상에 대한 언급이다. 즉, 人과 物이 현실에 발현될 때, 발현하는 것은 氣(發之者, 氣也)이고, 기를 발현시키는 원리는 理(所以發者, 理也)이다. 여기에서 이와 기는 어느 한쪽이 우위성을 주장할 수 없다. 왜냐하면, 기가 아니면 발현할 것이 없고, 리가 아니면 발현시킬 것이 없기(非氣則不能發, 非理則無所發)때문이다. 사계의 이같은 理氣論은, 퇴계의 '理氣互發說'을 비판하고 율곡의 '氣發理乘一途說'을 계승한 것인데, 後述할 心性論으로 연결이 된다.

(2) 心性論

沙溪의 心性論은 율곡의 심성론을 계승하고 퇴계의 심성론을 비판한다는 데서, 그의 理氣論과 궤를 같이 한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退溪는 理氣互發說을 주장하였는데 이것을 心性論으로 換言하면 四端은 理에 七情은 氣에 分屬되어 '四端七情互發說'이 된다. 퇴계의 이러한 '四端七情互發說'은, 멀리는 陽村 權近의 {入學圖說}과 가까이로는 鄭之雲(1509-1561, 자는 靜而, 호는 秋巒)의 [天命圖說]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그리고 '四端七情互發說'에서 四端의 발현형태는 '理가 발함에 氣가 따르는 것(理發而氣隨之)'이고 七情의 발현형태는 '氣가 發함에 理가 탄 것(氣發而理乘之)'이다. 퇴계의 '四端七情互發說'에 대한 사계의 辨疑는 주로 스승인 栗谷의 설에 의거하고 있다.

{經書辨疑·大學}, 經一章, '小註雲峯胡氏∼是從念頭說'條.

雲峰 胡氏 : "{大學章句}의 '所發'이란 두 글자는, 두 가지 의미로 나눌 수 있다. …… 하나는 性이 發하여 情이 되는 것(性發爲情)이고, …… 또 다른 하나는 心이 發하여 意가 되는 것(心發爲意)이다. …… '性發爲情'은 그 최초에 善하지 않음이 없고, …… '心發爲意'는 善할 수도 있고 善하지 않을 수도 있다."

栗谷 : "雲峯의 說은 四端의 情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善惡의 정을 통틀어 논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배우는 자들은 종종 雲峰의 설을 보고는 情은 善하다고만 여긴다."

朱子는 {大學章句} 經文의 '誠其意'에 대한 주를 달면서, '意'를 '心之所發'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雲峰 胡氏는 '發'의 의미를 '性發爲情'과 '心發爲意'로 나누고, 前者는 純善하고 後者는 有善·有不善이라고 풀이를 하였다. 일찍이 栗谷은, "七情은 人心·道心·善惡의 총체적인 명칭이요, …… 四端은 곧 道心과 人心 중의 善한 것이다"라고 한 적이 있다. 이같은 논리는 七情만이 情이 아니라, 四端 또한 情으로 여기는 것이다. 즉, 칠정 밖에 따로 사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칠정 안에 도심과 인심이 있으며, 이 중 善한 것이 곧 四端인 것이다. 그런데 雲峰 胡氏는 '性發爲情'이라고 하여, 情을 純善의 性이 발현된 형태로 파악을 하였다. 이는 栗谷이 정의한 情의 개념에서 善惡이 있을 수 있는 七情을 제외한 四端之情만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운봉 호씨의 설은 자칫 학자들로 하여금 情을 善 일변도로만 보게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이상의 栗谷의 心性說은 心之已發로서의 四端과 七情을 모두 情으로 여기는 氣發一情說로, 心의 發現을 純善 一邊의 情과 有善有惡의 意로 나누어 본 雲峰의 說을 비판한 것인데, 이는 바로 四端을 理之發, 七情을 氣之發로 여겨 情을 둘로 나누어 보는 退溪의 理氣互發二情說에 대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사계 또한 율곡의 설을 계승하여, 四端과 七情을 二情으로 나누는 것은 모두 理氣說을 투철하게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비판하였는데, 그는 理氣說의 연장인 心性說에서 주목할 만한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經書辨疑·大學}, 經一章, '在明明德小註∼所以虛靈'條.

北溪 陳氏 : "사람은 태어날 때에 天地의 理를 얻고, 또 天地의 氣를 얻어 바탕(質)을 형성한다. 이처럼 理와 氣가 합쳐졌기 때문에 虛靈한 마음을 지니게 된다."

沙溪 : "사람과 만물의 태어남은 똑같이 天地의 理氣를 얻어서인데, 지금 사람만을 지칭하여 '理氣를 얻어 虛靈한 마음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면, 禽獸와 草木의 가리어 막힘(蔽塞)은 오직 理氣를 얻지 못해서 그러하다는 말인가? 人과 物은 똑같이 理氣를 얻었을 것이나, 氣가 理를 가리기 때문에 (物이) 蔽塞된 것이다."

北溪 陳氏는 인간의 태어남은 天地의 理氣를 얻어서 나는 것으로 理와 氣가 합해졌기 때문에 虛靈한 본성을 지닐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북계 진씨의 논리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天地의 理氣를 얻어 태어나는 존재로 '人間'만을 언급한 것이다. 주자학의 기본 개념인 '理一分殊'에서 하나인 理를 부여받는 존재는 인간뿐만이 아니라, 禽獸·草木을 포함한 萬物이다. 그러므로 사계의 입장에서 보면, 이기를 부여받은 존재로 인간만을 언급한 북계 진씨의 설은 주자학의 근본이념에 위배되는 것이다. 이에 사계는 인간이든 금수·초목이든 태어날 때 理氣를 부여받는 점에서는 동등(同得理氣)하나, 理가 氣에 의해 가리어지는 정도(理爲氣掩)에 따라 만물의 차등이 생겨난다고 본다. 사계의 이같은 '人物同得理氣說'은 다분히 현상의 차별성의 원인인 '理爲氣掩'보다는 본질의 동등함인 '同得理氣'를 강조하는 입장이다.

(3) 格物論

사계의 {經書辨疑·大學}에서 논의가 가장 많이 되고 있는 부분은 格物論(物格論)이다. 왜냐하면 格物論은 주자학의 핵심으로, 주자의 독창적인 견해가 제시되어 있으며, 이에 대하여 韓中의 여러 학자들의 논의도 일치되지 않고 분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格物論의 논의에서, 중국에서는 '格物의 本義는 무엇인가?'라는 格物論에 집중되어 있는데 비해, 조선에서는 '物格의 本義는 무엇인가?'라는 物格論에 치중되어 있다.

사계의 格物論은 물론 주자학의 입장에 서기 때문에 양명학의 格物論을 일절 수용하지 않고, 物格論에 그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주자의 物格論은 그 讀法에 따라 여러 갈래로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조선전기 사계의 선배 학자들에 의해 이미 제시되고 있다. 이에 沙溪는 선배들의 物格論의 유형을 {大學章句} 補亡章의 '物理之極處, 無不到'의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하고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① 鄭經世의 物理到吾心說

景任(鄭經世의 字-필자)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朱子의 이른바 '物理之極處, 無不到'라는 이 한 구절은 자세히 살펴보아야 된다. 여기에서 '이른다(到)'는 것은 어디에 이른다는 것인가? 이는 내 마음에 이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개 格物을 한 뒤에야 物格이 되니, 비유하면 客을 청하면 客이 오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런데 지금 物理가 極處에 이른다고 한다면, 이는 전혀 말이 되지 않을뿐더러 또한 문리도 통하지 않는다. 이는 나의 마음과 서로 상관이 없는 것이니, 어디에 그 안과 밖을 합한 道가 있는 것인가?"

② 李滉의 吾心到極處說

退溪與奇高峰書曰 : "'物格'과 '物理之極無不到'의 說에 대하여 삼가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전에는 제가(李滉-필자) 잘못된 說을 굳게 지켰습니다. 그래서 朱子의 '理에는 情意와 計度와 造作이 없다'는 說만을 알아 고수하여, 내가 物理의 極處에 이르는 것이지 어찌 理가 스스로 極處에 이를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物格의 '格'과 無不到의 '到'를 모두 내가 이르고(己格) 내가 다다르는 것(己到)으로 여겼습니다."

③ 李珥의 物理到極處說

일찍이 栗谷先生에게, "'物格'은 物理가 極處에 이른다는 것입니까? 나의 앎이 극처에 도달한다는 것입니까?"라고 여쭈었다. 이에 선생께서는, "物理가 극처에 이른다는 것이다. 만약 나의 앎이 극처에 도달한다면, 이는 '知至'라고 해야지 '物格'이라고 해서는 안된다. '物格'과 '知至'는 한 가지이니, 物理의 측면에서 말한다면 物格이고, 吾心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知至이니, 두 가지가 아니다"고 답하였다.

위에서 鄭經世, 李滉, 李珥의 物格說을 그 구분의 편의를 위해 각각 物理到吾心說·吾心到極處說·物理到極處說로 命名해 보았다. 이를 차례대로 살펴보면, 愚伏의 '物理到吾心說'은 손님을 청하면 손님이 오는 것처럼 物을 窮究하면 物理가 내 마음에 이른다는 것이며, 退溪의 物格說인 '吾心到極處說'은 내가 物을 窮究하여 내 마음이 物理의 極處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즉, 우복의 해석대로 '物理之極處, 無不到'를 읽으면, '物理之極處가 無不到라'고 懸吐를 해야 되며, 퇴계의 해석대로 '物理之極處, 無不到'를 읽으면, '物理之極處에 無不到라'고 懸吐를 해야 된다. 결국 이 둘의 입장은 格物을 하는 주체로서의 '吾心'을 중시한다는 데서는 입장을 같이하나, 愚伏은 吾心에게로 物理를 오게 하는 것이며, 退溪는 吾心을 物理에게로 옮겨가는 차이가 있다. 이에 비해 율곡의 '物理는 본래부터 그 極處에 도달해 있다'는 '物理到極處說'은 吾心과 物理를 대등하게 파악하고 있다. 율곡이, 物理의 측면에서 바라본 '物格'과 吾心의 측면에서 바라본 '知至'는 동일한 것의 두 측면이라는, '物格知至一事論'을 주장하는 所以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는 주자의 {大學章句} 격물해석의 외물 중시의 사유를 이어받아 발전적으로 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사계는 愚伏의 '物理到吾心說'이 주자의 글을 곡해한 데서 나온 誤說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朱子가 "物格이란, 事物의 理致가 각기 그 極處에 나아가 남음이 없는 것이다"고 하였는데, 이는 物에 있는 理가 그 極處에 나아간다면, 나에게 있는 知도 또한 (理의) 나아감에 따라 다하지 않음이 없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景任은 朱子의 '각기 그 극처에 나아간다'라는 말을, 物理가 각기 그 極處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物理의 極處가 내 마음에 이른다는 것으로 오해를 했다.

일찍이 주자는 "物格이란 事物의 理가 각각 그 極에 나아가 남음이 없는 것을 이름이다(物格者, 事物之理, 各有以詣其極, 而無餘之謂也)."라고 하였다. 사계가 보기에, 이 문구는 '物理가 그 極處에 나아가면, 吾知도 또한 그 (물리의) 나아간 바를 따라서 다하지 않음이 없다(理之在物者, 旣詣其極, 則知之在我, 亦隨所詣而無不盡矣).'는 의미이다. 그런데 愚伏은 주자의 이 문구에서 '各詣其極'을 '物理의 極處가 吾心에 來到한다(理之極處來到吾心)'는 의미로 잘못 해독을 한 것이라는 것이다. 우복에 대한 사계의 이러한 비판은, 마침내 스승인 율곡의 物格說만이 程朱의 적통을 이은 明白切當한 文字라는 확신을 갖게 한다. 그리하여 그는 율곡의 物格說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보충을 하기에 이른다.

物格과 知至는 하나이니, 栗谷은 '物理의 측면에서 말한다면 物格이고, 吾心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知至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朱子의 이른바, '物에 있는 理가 각기 그 極處에 나아간다'는 것은 '物格'이요, '나에게 있는 知가 또한 (理의) 나아감에 따라 다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은 '知至'이다. 그리고 내(沙溪-필자)가 말한, '物理는 원래 極處에 있다'고 하는 것은, 孝의 理와 忠의 理, 또한 禽獸와 草木의 理는 각기 저절로 그 極處에 있다는 의미이니, 어찌 사람이 窮究하기를 기다린 후에야 그 극처에 이른다고 하겠는가!

사계는 율곡의 '物格知至一事論'에서, 物格은 주자의 '理之在物者, 旣詣其極.'에 해당되며, 知至는 주자의 '知之在我者, 亦隨所詣而無不盡'에 부합된다고 하여, 율곡과 주자의 설을 일치시키고 있다. 그리고 나서 율곡의 物理到極處說을 한층 더 밀고 나가, 物理는 '원래부터 극처에 있는 것(元在極處)'이라고 한다. 이 극처에 도달해 있는 物理는 人間倫理인 忠孝之理로부터 草木禽獸之理에 이르는 萬象의 物理로서, 인간의 窮究를 기다리지 않고도 본래부터 그 極處에 도달해 있다는 것이다.

Ⅲ. 마무리-沙溪 經學의 經學史的 意味-

이상으로 우리는 沙溪의 {經書辨疑·大學}을 분석해 보았다. 분석의 결과 {經書辨疑·大學}은, 朱子註와 小註에 대한 辨疑가 다양한 형식을 통해 이루어져 있었으며, 그 내용은 주자학의 주요 범주인 理氣論·心性論·格物論에 대한 논의로 채워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계의 {대학}해석은 조선의 경학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그 의미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는 것으로써 본고를 마무리할까 한다.

사계 이전의 조선 주자학파의 {대학장구}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大學章句}에 대한 口訣·釋義·諺解와 {대학장구}에 대한 註疏學으로 대별할 수 있다.

{대학장구}에 대한 口訣·釋義·諺解는 원전에 대한 기초적이고도 정확한 이해를 시도하였다는 점에서, 주자학적 경학을 가능케 하는 중요한 기반이라 할 수 있지만, 아무래도 경전과 그 주석에 대한 분석으로서의 경학으로 간주하기에는 좀 미흡하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경학의 본격적인 성립은 {대학장구}에 대한 부연설명과 확대해석으로서의 주소학에 이르러서야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대학장구}를 경세학적 측면에서 확대해석한 경우보다는 주자(학파)의 심성론에 대한 견해를 부연설명한 저술들이 그 경학적-주소학적-인 성격이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다. 사계 이전에 이루어진 조선 전기의 이같은 경학저술은, 모두 주자의 {大學章句}와 주자학파의 {大學}설을 대상으로 하였다는 점에서는 사계의 {대학}해석의 연장선 위에 있다.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사계 경학의 중대한 특성 중의 하나가 師說의 계승·준수임을 고려할 때, 사계의 경학은 앞 시대의 성과의 축적이라는 기반 위에 이루어졌음은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영향과 계승의 관계를 고려하더라도, 사계와 이전 시대의 {대학}해석에는 중요한 차별성이 존재한다. 사계 이전에 이루어진 주자학파의 {대학장구}에 대한 경학저술은 그 내용면에 있어서 주자의 주요 사상범주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를 모두 담아내고 있지 못하며, 주로 주자(학파)의 심성수양론에 한정되어 있다. 그리고 형식면에 있어서도 주자의 {대학장구}와 주자학파의 小註에 대한 분석이 사계의 {經書辨疑·大學}에 비해 매우 소략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실로 사계에 이르러서야 주자(학파)의 {대학}설에 대한 분석이,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그 규모가 비교적 완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 경학 저술은 17세기에 이르러서야 그 양이 폭증하고 있는데, 주자학적 경학의 경우, 사계의 경학이 그 선편을 잡았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사계의 {대학}해석은 선대의 경학 저술들의 성과위에 주자학의 주요범주에 대하여 두루 고찰하고 있으며, 형식면에서도 매우 정비된 체제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經書辨疑·大學}에서 사계는 중국과 조선 諸儒의 설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 인용빈도와 논의의 전개에 있어서, 조선 주자학자들의 학설에 대한 인용이 중국 주자학자들의 학설에 대한 인용을 능가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인용에 있어서는 앞서 고찰해 보았듯이 여러 선배 학자들의 설을 동등하게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스승인 栗谷의 설을 정설로 삼아 여타의 학설을 비판하고 있다. 더 나아가 사계의 {대학}해석은 율곡과의 합작품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율곡의 설에 대한 인용과 지지가 두드러지며, 율곡의 설을 제시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적극적으로 해석·분석하고 이를 보충하고 있다. 이는 사계의 율곡학의 계승자적 위치를 경학상에서 엿볼 수 있는 한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주자학의 주요 범주에 대한 주자(학파)설에 대한 분석과 이러한 師說의 繼承·遵守는, 이후 조선의 주자학적 경학의 한 전형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의 주자학적 경학의 전개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필자가 고찰한 바로는 사계 이후의 17세기의 주자학적 {大學}해석은, 학자들 개인의 성향에 따라 주자학의 특징적인 면모를 계승하여 자신의 {大學}해석에 투영시켜 놓고 있지만, 사계의 {경서변의·대학}에 드러난 이러한 특징들을 그 공통적인 기반으로 삼고 있다. 특히 사설의 계승과 준수라는 측면에서 고찰해 보면, 사계의 경학이 기호학파의 경학에 미친 영향을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사계의 주자주의 異同에 관한 관심은, 이후 그의 제자들인 宋時烈, 韓元震(1682∼1751, 자는 德昭, 호는 南塘)으로 계승되면서 조선 주자학의 주된 과제 중의 하나가 되었다. 후일 宋時烈에 의해 착수되고 그의 제자인 韓元震에 의해 완성된 {朱子言論同異考}는 朱子說의 異同에 대하여 그 定論을 확정함으로써 풀어 나간 명저인데, 그 단초는 이처럼 사계에 의해 비롯된 것이다. 또한 沙溪의 {大學}해석의 영향은, 그의 제자인 李惟泰(1607∼1684, 자는 泰之, 호는 草廬)의 {大學答問}에서도 확인이 되고 있다. 그는 {大學答問}에서 사계가 {經書辨疑·大學}에서 행했던 주자학파의 주석에 대한 분석의 틀을 답습할 뿐 아니라, 내용면에 있어서도 스승의 설을 준수하여 {經書辨疑·大學}의 설을 무려 12군데에 걸쳐 {大學答問}에 전재하고 있다 이후 사계의 {大學}해석은 西人의 學脈을 이은 金幹(1646∼1732, 자는 直卿, 호는 厚齋)의 {大學答問}·{大學箚記}에도 크게 영향을 끼쳤다. 厚齋는, 서인 노론계의 입장에서 栗谷·沙溪·南溪의 {大學}說에 근거하여 이 두 책을 저술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大學}설은 이 세 학자의 설을 전재한 경우가 많으며, 특히 格物論에 있어서는 확고하게 율곡의 설을 지지하며, 理氣論은 사계의 주장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조선 주자학파의 경학에 있어서 사계의 경학이 미친 영향은, 앞 시대의 설을 이어받아 형식과 내용면에서 정비하여, 조선의 경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17세기 이후 경학의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繼往開來'에 비견될 수 있다. 그러나 사계의 주자학적 경학세계는 경학을 성리학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온 폐단도 있다. 앞서 보았듯이 사계는 주자가 {대학장구}를 저술한 이래 {대학}해석사에서 중시되는 경학적 문제-章句改定·錯簡說·闕文說·誤字說·作者說·著作時期說·明德說·格物說 등-에 있어서는 거의 다루고 있지 않으며, 주자학에서 중시되는 철학적 문제들만을 집중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이는 경학을 성리학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와서 후일 주자학적 경학이 발전하는데 심각한 장애로 작용하게 된다. 조선 후기의 탈주자학적 경학이 성리학의 형이상학적 문제에서 비교적 탈피하여, 경학적 문제와 실천지향, 하학지향에 집중한 것도 바로 주자학적 경학의 이러한 폐단에 대한 비판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愼獨齋 金集의 哲學思想

- 心情說의 淵源關係를 中心으로 -

윤 용 남 (성신여대)


<목 차>




Ⅰ. 序論

Ⅱ. 朱子의 心情說

Ⅲ. 栗谷의 心情說

Ⅳ. 龜峰의 心情說

Ⅴ. 沙溪의 心情說

Ⅵ. 愼獨齋의 心情說

Ⅶ. 結語



Ⅰ. 序言

朱子 性理學은 중국에서보다도 오히려 한국에서 더 큰 反響을 일으켰다고 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많은 학자들이 그렇게 생각하였고, 조선조말의 華西學派에 이르러서는 그러함을 自任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철학은 본래 답습하기 곤란한 학문으로 학자마다 서로 다른 입장에서 자기 학설을 전개하였다. 이에 여러 선현의 학설을 비교 분석하여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찾아내어 정리·계승하는 것은 현재의 우리가 해야할 작업이다.

한국 성리학은 대개 退溪學派와 栗谷學派로 나누고 있으나, 각 계열 내에서도 또 같은 점과 다른 점이 있는데, 이것을 정밀하게 분석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꼭 필요한 일이다. 栗谷(1536∼1584)의 適傳이라고 하는 沙溪(姓名: 金長生, 字: 希元, 諡: 文元, 沙溪는 號임, 愼獨齋의 父, 1548∼1631)만 하더라도 栗谷의 학설과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栗谷의 어떤 이론을 수용하였고, 어떤 점을 다르게 보면서도 하나의 完定的인 철학체계를 이루었는가를 고찰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어느 한 두 先儒의 학설을 비교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그 前後 학자들의 이론을 아울러 검토하는 작업도 병행해야 할 것이다. 그런 한 시도로서 이번 연구에서 愼獨齋의 학설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愼獨齋(姓名: 金集, 字: 士剛, 諡: 文敬, 愼獨齋는 號임, 1574∼1656) 先生의 철학사상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그 先河인 栗谷, 龜峰, 沙溪의 학설과 비교하여 어떤 점이 같고 어떤 점이 다른가를 밝혀야만 그의 입장이 분명하게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愼獨齋는 다른 先儒들과는 달리 철학사상에 대하여 언급한 자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으며, 오직 經筵에서 人心道心에 대하여 임금과 문답한 내용이 조금 있을 뿐이다. 그래서 愼獨齋의 철학사상을 논함에 있어 그가 私淑하였거나 직접 배운, 朱子·栗谷·龜峰(姓名: 宋翼弼, 字: 雲長, 1534∼1599) 그리고 沙溪의 人心道心說 및 四端七情論을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이와 같이 연구범위를 극히 좁게 제한하면 그 철학의 전모를 밝히기는 어렵게 되지만, 한편으로는 한 주제에 대하여 깊이 있게 분석함으로써 보다 세밀한 비교분석이 이루어질 수 있는 장점도 있다.

心情說은 退溪와 高峯이 장기간의 토론을 벌인 이후로 많은 先儒들이 깊은 관심을 가지고 歸結點을 찾고자 노력한 중요한 과제이다. 여기 栗谷學派의 心情說을 비교·분석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한국철학의 한 축을 해명하는 것이 될 것이다.

Ⅱ. 朱子의 心情說

한국의 성리학자들이 대부분 스승으로 승인하고 있는 朱子의 학설을 먼저 제시하여 그 후 우리 先儒들이 어떻게 자신의 학설을 새롭게 주장하였는가를 밝히고자 한다. 단 여기서 '心情說'이라는 말은 人心道心說 및 四端七情說을 포괄하는 용어로 사용한다. 朱子는 中庸 序文에서 人心과 道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개 일찍이 논하건대, 心의 虛靈知覺은 하나뿐인데, 人心과 道心의 다름이 있다고 하는 것은 혹은 形氣의 사사로움에서 생기고 혹은 性命의 바름에서 근원하여 知覺된 것이 같지 않으므로 혹은 위태로워 불안하고 혹은 미묘하여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形氣가 있지 않을 수 없으므로 비록 가장 지혜로운 자라도 人心이 없을 수 없고, 역시 性命이 있지 않을 수 없으므로 가장 어리석은 자라도 道心이 없을 수 없다. 이 둘이 마음속에 섞여 있는데 다스릴 줄을 모르면, 위태로운 자는 더욱 위태로워지고 미묘한 자는 더욱 미묘해져서, 公正한 天理가 끝내 사사로운 人欲을 이길 수 없다. 정밀하면 이 둘 사이를 살펴서 섞이지 않게 하고, 한결같으면 바른 본심을 지켜서 떠나지 않게 한다. 이에 종사하기를 조금도 끊임없이 하여, 반드시 道心이 항상 한 몸의 주인이 되게 하고 人心이 매양 그 명령을 듣게 한다면 위태로운 자는 安全하여지고, 미묘한 자는 드러나서 動靜과 言行이 저절로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잘못이 없게 될 것이다.

朱子의 이 글은 人心道心說을 가장 간결하고 분명하게 서술한 문장이다. 이 글에서 朱子는 첫째 心은 본래 하나이지 둘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고, 둘째 人心과 道心의 구분은 形氣와 性命의 차이에서 생기며, 셋째 人心은 위태롭고 道心은 미묘하며, 넷째 人心과 道心은 성인이든 極惡無道한 사람이든 누구나 兩者를 모두 가지고 있으며, 다섯째 이 둘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天理가 人欲을 이길 수 없으며, 여섯째 잘 살피고 지켜서 道心이 항상 주인이 되게 하면 잘못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人心과 道心의 구분에 관한 것이다. 먼저 形氣와 性命은 각각 氣와 理를 말하는 것으로서 形氣는 사람을 형성하고 있는 形體를 가진 氣, 즉 肉體를 말하는 것이며, 性命은 天命之謂性의 그 性과 命이다. 그런데 육체는 萬人이 각자 私有하고 있는 것으로서 私的인 것이며, 性命은 萬人이 함께 公有하고 있는 것으로서 公的이며, 따라서 公正한 것이다. 다음으로 生·原은 각각 形氣와 性命에서 어떻게 人心道心이 이루어지는가를 말한 것인데, 이는 뒤에 이어 나오는 知覺이 이루어졌다는 것과 연계시켜 생각해야 한다. 즉 知覺이 形氣之私를 기준으로 生成된 것은 人心이고, 性命之正을 기준으로 發原한 것은 道心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生字와 原字로 다르게 쓴 것은 그 知覺의 양상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즉 生은 본래 판단의 기준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각자의 形氣에 바탕하여 새롭게 생성된 기준에 따라 판단이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原은 본래 있었던 기준대로 知覺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知覺은 어떤 對象에 대하여 알고 깨닫는 것이니, 어떤 대상이 나를 향해 다가오거나 변화가 일어나고 있을 때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판단해야 하는데,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하는가가 문제이다. 그런데 이 人心道心은 단지 그 대상의 존재에 대한 사실판단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좋고 싫음, 혹은 옳고 그름 등의 가치판단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치판단에는 그 가치의 기준이 문제가 된다. 무엇이 가치 있다고 보는가 하는 문제에서 朱子는 크게 두 가지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는 자기의 形氣, 즉 육체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萬人 공통의 性命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性命은 理로서 이미 나에게 內在해 있는 가치기준이고, 形氣는 이미 가치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때 그 때 기준을 설정한다. 예를 들면 나는 사과를 좋아하지만 사과를 물리도록 많이 먹은 다음에 보는 사과는 좋게 느껴지지 않는다. 時空의 변화에 따라 기준이 달라진 것이다. 그러므로 人心은 항상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 판단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朱子는 形氣에서 生字를 사용한 것이다. 반면에 性命은 時空을 초월하여 항상 동일한 기준이 있는 것이고 내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朱子는 性命에서 原字를 사용한 것이다.

생각건대 形氣는 모든 사람이 각자 私有한 것이므로 주관적인 것이 되며, 性命은 모든 사람이 함께 公有한 것이므로 객관적인 것이 된다. 그런데 주관적인 가치 평가는 항상 公正하다고만 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그러므로 언제나 공정할 수 있는 객관적인 평가를 통하여 검증할 필요가 생긴다. 이것이 바로 道心常爲一身之主이다. 즉 주관적인 판단은 객관적인 판단의 승인을 거쳐 용인될 수 있는 것이며, 만일 그렇지 못하면 惡이 되는 것이다. 다만 道心常爲一身之主한다고 하더라도 그 출발이 人心이었다면 여전히 人心으로서 남아 있는 것이지 人心은 사라지고 道心만이 남는 것은 아니다.

다음으로는 人心道心과 四端七情의 관계를 고찰하고자 한다. 人心道心은 外部 대상에 대한 感知(外感)이며, 四端七情은 感知한 다음 안에서 밖으로 反應(內應)해 나가는 것이다. 여기서 朱子는 외부 대상에 대한 感知가 그대로 외부로의 반응에 적용되는 것으로 본다. 즉 人心은 七情을 誘發하고, 道心은 四端을 誘發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朱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四端은 理가 發한 것이고, 七情은 氣가 發한 것이다.

여기서의 理와 氣는 각각 人心道心에서의 性命·形氣와 다르지 않다. 그것은 외부대상을 感知할 때, 판단의 기준으로 작용하였고 나아가 반응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性命과 形氣는 人心道心에서부터 四端七情에까지 연속적으로 그 主體로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四端이든 七情이든 모두 性에 그 근거를 둔 것이므로 모두 仁義禮智에 배당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朱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묻기를, "喜怒哀懼愛惡欲 七情은 생각해 보면 역시 性으로부터 發한 것입니다. 다만 惡는 羞惡로부터 發出한 것이며, 喜怒愛欲은 모두 惻隱으로부터 發出한 것 같습니다."라고 하니, 답하기를, "哀懼는 무엇이 發한 것인가? 보건대 역시 다만 惻隱으로부터 發한 것이다. 대개 懼도 역시 ??이 심한 것이다. 그러나 七情은 四端에 분배할 수 없다. 七情은 본래 四端 옆으로 비껴 지나가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四端과 七情의 근원을 性에서 찾을 때, 四端은 본래 仁義禮智에 각각 배당시켜 말한 것이므로 문제될 것이 없지만, 七情은 처음부터 그 근원이 仁義禮智가 아니라 形氣였기 때문에 仁義禮智에 그대로 배당하는 것에 어려움이 있고, 단지 비슷하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생각건대 朱子의 人心道心과 四端七情은 모두 일관되게 性命·形氣로 양분하여 말할 수 있다. 즉 人心道心에 있어서는 외부대상을 感知하여 가치평가를 할 때, 각각 性命과 形氣를 판단기준으로 하였고, 또 그들이 주체적으로 그렇게 되도록 하였으며, 四端七情에 있어서는 性命과 形氣가 반응의 기준이 되었고, 또 그들이 주체적으로 그렇게 반응하도록 하였다. 바꿔 말하면 性命과 形氣, 즉 각자가 가지고 있는 理(性)와 氣는 각각 외부대상을 感知하고, 그에 반응하는 데 있어서 주체적으로 작용하였다는 것이다. 이 때 氣의 感知와 反應은 善惡이 검증되지 않은 것이고, 따라서 항상 惡으로 歸結될 가능성을 농후하게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항상 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道心이 한 몸의 주장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Ⅲ. 栗谷의 心情說

위에서는 朱子의 心情說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栗谷은 朱子說과는 다른 주장을 하고 있는데, 먼저 栗谷의 주장을 살펴본 다음 朱子의 것과 비교해 보고자 한다.

栗谷은 朱子와 달리 외부 대상에 대한 知覺判斷의 과정을 설정하지 않는다. 이는 그의 理氣說에 따른 것이다. 栗谷은 事物間의 상호작용, 즉 感知·反應 과정을 氣와 氣가 서로 만날 때 일어나는 作用·反作用의 관계로 본다. 즉 어떤 외부 사물이 나에게로 다가올 때, 나는 그에 대하여 나의 氣가 즉시 反作用을 일으킨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栗谷은 人心道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情이 發함에 道義를 위해 發하는 자가 있으니, 부모에게 효도하고자 하는 것, 임금에게 충성하고자 하는 것, 어린애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고 惻隱해 하는 것, 不義를 보고 羞惡하는 것, 宗廟 앞을 지날 때에 恭敬하는 것 등의 類가 이것이다. 이것을 道心이라고 한다. 肉體를 위해 發하는 자가 있으니, 배고프면 먹으려고 하는 것, 추우면 옷을 입으려고 하는 것, 피로하면 쉬려고 하는 것, 精力이 왕성하면 아내를 생각하는 것 등의 類가 이것이다. 이것을 人心이라고 한다.

栗谷이 人心과 道心을 구분함에 있어서 朱子처럼 形氣·性命 및 生·原字를 사용하지 않고, 道義와 口體 및 爲字를 사용한 것은 人心과 道心의 구분을 朱子와 달리하기 때문이다. 爲字는 무엇을 '위한다'는 뜻이니, 이는 행위의 動機를 뜻한다. 즉 栗谷은 행위의 동기를 기준으로 하여 自身의 육체를 위한 것이면 人心으로, 道義를 위한 것이면 道心으로 구분한다. 이것은 외부 대상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반작용으로 일어난다. 이와 관련하여 栗谷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人心과 道心이 서로 시작과 끝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지금 사람의 心이 性命의 바른 것에서 곧게 나왔으나 혹 이를 순순히 따르지 아니하고 私意가 개입하면 이는 시작은 道心으로 하였으나 끝내기는 人心으로 한 것이다. 혹은 形氣에서 나왔으나 바른 理에 어긋나지 않았으면 진실로 道心에서 떠나지 않은 것이며, 혹 바른 理에 어긋났으나 잘못임을 알아서 굴복시켜서 그 욕심을 따르지 않았으면 이는 시작은 人心으로 하였으나 끝내기는 道心으로 한 것이다. 대개 人心道心은 情과 意를 겸해서 말한 것이지 단지 情만을 가리킨 것이 아니다.

栗谷은 여기서 人心道心終始說을 주장하고 있다. 사람은 외부의 자극에 대하여 즉각적인 반응을 하는데, 혹은 자신의 이익을 위한 동기를 가지고 하는 경우도 있고, 혹은 道義를 따르고자 하는 동기를 가지고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차적인 반응에 대하여 다시 검토하는 과정을 거친다고 본다. 그런 다음 처음의 동기대로 계속 밀고 가는 경우도 있고, 그 동기를 바꾸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생각건대 처음의 一次 反應은 情이다. 이 情은 전후좌우를 잘 살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반응부터 일으키는 것이다. 그런 다음 이를 검토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이것은 意이다. 그렇기 때문에 栗谷은 朱子가 情과 意를 理氣關係와 같은 一體로 보는 것과는 달리 情과 意를 분리하여 先情後意라고 한다. 栗谷이 人心道心을 情도 되고 意도 된다고 보는 것은 人心道心을 感知하는 데서 그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반응까지도 포함시켜 보려는 것이다. 이처럼 반응, 즉 情까지 포함하게 되면 그 善惡을 논할 수 있게 된다. 이 때 惡에 해당하는 것은 당연히 人心이다. 그러므로 栗谷은 궁극적으로 人心을 없애야 할 대상으로 보며, 聖人의 경우는 人心이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외부 대상에 대하여 자신의 이익을 먼저 챙기려는 동기를 가지고 반응하는 人心을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으며, 성인은 처음부터 그런 식의 대응은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범인의 경우 人心이 먼저 發出하였더라도 그것이 바로 惡으로 終結되는 것은 아니고, 意가 다시 이를 검토하여 道心으로 환원시킬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는 人心이 바로 惡은 아니다. 그러나 육체를 위하고자 하는 동기는 이미 惡이다.

한편 栗谷의 四七論은 동기를 중심으로 하여 나누어지는 人心道心과는 달리 그 결과의 善惡을 가지고 나눈다. 즉 情 전체는 七情이다. 여기에는 善한 것과 惡한 것이 모두 포함된다. 그 중에서 善한 것만을 따로 모아 특별히 이름을 붙인 것이 四端이다. 이제 人心道心과 연결하면 그 동기가 어디에 있든 선한 것만을 지칭하려면 四端이라 하고, 善情과 惡情을 모두 포괄해서 지칭하고자 하면 七情이라 한다. 여기서 당연히 도출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는 凡人의 七情은 四端보다 그 外延이 넓으므로 四端이 그 속에 포함되지만, 성인의 七情은 四端과 그 外延이 같은 同延槪念으로서 四端과 七情이 완전히 일치한다.

그러므로 栗谷은 四端과 七情이 모두 仁義禮智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고 보고, 兩者를 모두 仁義禮智에 배당하려고 한다. 栗谷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七情이 四端을 포함한다는 말을 우리 兄께서는 아직 보지 못하였습니까. 대저 사람의 情이 기뻐해야 할 때 기뻐하는 것, 죽음 앞에서 슬퍼하는 것, 친한 이를 보고 慈愛하는 것, 理를 보고 연구하고자 하는 것, 賢人을 보고 본 받고자 하는 것(이상 喜哀愛欲 四情)은 仁의 端緖입니다. 怒해야 할 때 怒하는 것, 미워해야 할 때 미워하는 것(怒惡 二情)은 義의 端緖입니다. 尊貴한 이를 보고 어려워하고 두려워하는 것(懼情)은 禮의 端緖입니다. 喜怒哀懼해야 할 즈음에 마땅히 기뻐하고 怒하고 슬퍼하고 두려워할 줄을 아는 것(이것은 是에 속한다.)과 또 마땅히 기뻐하고 怒하고 슬퍼하고 두려워해서는 안되는 줄을 아는 것(이것은 非에 속한다. 七情 모두의 옳고 그름을 아는 情)은 智의 端緖입니다. 善情이 發하는 것을 일일이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대개 이와 같습니다. 만일 四端을 七情과 맞춰 본다면, 惻隱은 愛에 속하고, 羞惡는 惡에 속하고, 恭敬은 懼에 속하고, 是非는 기뻐해야 할 것인지 怒해야 할 것인지의 與否를 아는 情에 속합니다. 七情 외에 다시 四端은 없습니다.

이는 朱子가 四端과 七情을 서로 다른 것으로 보면서 완전히 일치시키기 어렵다고 보는 것과 다르다. 또한 栗谷의 人心과 道心은 四端七情과 연결되지 않는다.

생각건대 栗谷의 人心道心과 四端七情은 모두 情을 분류하는 기준이다. 人心道心은 情의 동기가 무엇인가에 따라 善惡으로 구분하는 것이고, 四七은 그 결과의 善惡을 가지고 구분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동기가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어지면 안된다. 왜냐하면 처음에 자신의 육체를 위한 동기에서 출발한 人心은 惡한 것으로서 나중에 반드시 道義를 위한 道心으로 전환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人心이 모두 道心으로 전환되고 나면 人心은 없어지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이 나를 헐뜯는 소리를 듣고 처음에는 감정적으로 대응하려다가, 나중에 이성을 되찾아 잘 타일렀다면, 이는 人心으로 시작해서 道心으로 끝난 것이다. 그런데 처음에 감정적으로 대하려던 人心이 끝까지 유지된다면 이는 惡이다. 따라서 人心은 道心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인은 처음부터 그런 감정적인 대응을 하지 않는다. 성인은 완벽하게 淸粹한 氣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자기에게 불리한 일이 닥치더라도 항상 도리를 먼저 생각하여 道心대로 대응한다. 그러나 범인은 濁氣가 섞여 있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이런 濁氣를 변화시켜 모두 淸氣로 바꾸는 것이 學者의 일이다.

Ⅳ. 龜峰의 心情說

沙溪와 愼獨齋는 栗谷의 說뿐만 아니라 龜峰의 說도 수용하고 있으므로 다음에는 龜峰의 心情說을 고찰하고자 한다. 龜峰은 栗谷과 절친한 사이로서 학문에 대하여 많은 토론을 하였으나, 그 학설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있다. 우선 龜峰은 栗谷의 人心道心說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 그대가 '叔獻이 人心에서 發하여 道心이 된다고 하는 주장은 괜찮다.'고 말한 것도 옳지 않다. 人心도 성현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心인데 왜 반드시 變하여 道心이 되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성인에게는 人心이 없는가?

栗谷은 人心을 개인적인 이익을 도모하고자 하는 동기를 가지고 처음 發하는 情으로 보기 때문에 惡으로 규정하며, 따라서 성인은 처음부터 이런 不純한 情을 發하지 않는 것으로 본다. 이렇게 되면 龜峰의 말처럼 성인은 人心이 없게 된다. 그러나 龜峰은 그런 견해에 대하여 반대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다. 龜峰은 人心道心을 公私에 따라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叔獻이 '兩者가 모두 한 가지 일에서 發한다.'고 말한 것은 더욱 이해할 수 없다. 兩者는 다만 하나의 心이 發한 것이나, 소리·색·냄새·맛을 위한 것을 人心이라 하고, 仁義禮智가 나온 것을 道心이라고 한다. 능히 다스리면 公이 私를 이겨서 道心이 주인이 되고, 능히 다스리지 못하면 私가 公을 이겨서 人心이 주인이 되고, 나아가 人慾이 되는 것을 막지 못한다.

栗谷은 한 가지 일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에 따라 人心道心이 나뉘는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朱子가 말한 "二者雜於方寸之間"의 雜을 한 가지 사건에 대하여 두 가지 동기가 숨어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龜峰은 人心과 道心은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일이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즉 聲色臭味 등 私的인 일과 관련되어 것은 人心이고, 非私的인, 즉 公的인 일과 관련되어 있는 것은 道心이라고 한다. 물론 私的인 일 자체가 반드시 惡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이런 私的인 일은 성인도 없을 수 없다. 그러나 心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생각하는 일마다 자신의 편익과 안락을 위한 私的인 일에만 몰두하게 되고, 公的인 일에는 무관심하게 된다. 그러므로 龜峰은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叔獻은 理에는 소리나 냄새가 없으므로 理는 본래 精微하다고 하고, 公은 또 다만 發한 것이 微小하다고만 말하고 微小한 까닭을 말하지 않았으니, 모두 잘못이다. 또 道心의 隱微함과 顯著함, 그리고 人心의 安全함과 위태로움은 서로 消長한다. 人心이 위태로우면 道心이 隱微하고, 道心이 顯著하면 人心이 안전하다.

龜峰은 道心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은 理가 無聲無臭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發한 것이 微小하기 때문도 아니며, 단지 氣 속에 섞여 있어서 隱微하기 때문에 보기 어려운 것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도 범인들에게나 해당하는 것이고, 성인은 애당초 隱微하지도 않다. 그러나 아무리 小人이라 하더라도 道心이 완전히 소멸된 적도 없다. 다만 人心이 많이 일어날 때는 道心이 숨고, 道心이 잘 드러날 때는 人心이 일어나더라도 惡으로 갈 위험이 작아서 人心도 안전하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公的인 일과 私的인 일이 모두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私的인 일에 집착하면 公事를 소홀히 하게 되지만, 公事를 소홀히 하거나 부당하게 처리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私的인 일을 하는 것은 타당하다고 할 것이다. 龜峰이 人心道心을 나누어 말하는 것은 人間事 중의 이런 측면을 말하는 것이다.

한편 龜峰은 사람의 이런 일들은 모두 理氣合의 心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人心道心을 理氣중 어느 하나에 소속시킬 수 없다고 한다. 龜峰은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心은 理와 氣가 合해진 것이니, 人心과 道心이 모두 이 心에서 發한다면 진실로 理나 氣에 分屬시켜 말할 수 없다. 그러나 人心·道心의 知覺이 다른 측면은 形氣와 性命으로 나누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栗谷은 대개 氣發理乘一途를 말하며, 退溪는 理發과 氣發을 모두 말한다. 그러나 龜峰은 이 모두가 잘못이라는 것이다. 心은 본래 理와 氣가 合하여 이루어진 것이므로 항상 理와 氣가 함께 發하는 것이지, 어느 하나의 發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知覺한 것이 서로 다른 人心道心을 보면 하나는 形氣에 관한 일을 感知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性命에 관한 것을 感知한 것으로 나눌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이 때는 하나를 理, 다른 하나를 氣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四七論과도 연계된다. 龜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내준 글에 '四端은 理에서 發하고, 七情은 氣에서 發한다.'는 주장은 심히 온당하지 못하다. 四端과 七情은 무엇이 理·氣의 發이 아니겠는가. 다만 한 측면만 말하면 四端이며, 전체를 말하면 七情이다. 四端은 理만을 중시하여 한 쪽을 말한 것이고, 七情은 理와 氣를 모두 들어서 전체로 말한 것이다.

龜峰은 栗谷과 달리 人心道心에 대하여는 직접적으로 善惡을 논하지 않는다. 그것은 龜峰이 人心道心을 情으로 보지 않고, 知覺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 知覺의 내용에 따라, 즉 知覺이 公的인 性命에 관한 일이면 理로 되지만, 私的인 形氣에 관한 일이면 理로도 될 수 있고 氣로도 될 수 있다. 이는 四端과 七情으로 이어져서 四端은 理의 發이고, 七情은 氣의 發이라는 것이다. 이는 知覺, 즉 外感에서 이미 人心과 道心을 구분하므로 필연적으로 內應, 즉 四七에서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겉으로 표현된 것은 栗谷의 四端은 純善하고 七情은 兼善惡이라는 말과 유사하나, 栗谷의 七情은 四端을 포함하지만, 龜峰의 七情은 四端과 다르다. 위 인용문에서 善惡이라 하지 않고 理氣를 말하는 것은 그의 이런 입장이 반영된 것이다. 이는 또한 栗谷의 四七說은 결과의 善惡만을 논하는 것이지만, 龜峰의 四七說은 결과뿐만 아니라 그 처음과 과정 중에서 모두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退溪의 四七說과의 차이는 退溪가 理氣의 주체적인 發을 인정한 반면, 龜峰은 그런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發은 언제나 理氣合의 心이 하는 것이다.

생각건대 龜峰의 心情說은 그의 理氣論에서부터 일관된 체계를 가지고 논해진 것이다. 그는 理를 善, 氣를 兼善惡으로 본다. 결국 각 사물의 善한 德目이 理이고, 善惡이 나뉘지 않은 것은 氣이다. 따라서 善한 德目으로서의 理를 感知한 것은 道心이고, 이는 나아가 四端으로서 그 외부 대상에 對應한다. 善惡未定의 形氣를 感知한 것은 人心이고, 이는 나아가 七情으로서 그 對象에 대응한다. 이러한 理氣, 心情說은 栗谷과는 크게 다른 것이다.

Ⅴ. 沙溪의 心情說

위에서는 沙溪와 愼獨齋 철학사상의 직접적인 淵源인 栗谷과 龜峰의 心情說을 고찰하였다. 이제 沙溪가 위 두 선생의 철학을 어떻게 수용하였는가를 心情說을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沙溪는 栗谷이 人心을 惡으로 보는 점에 대하여 의문을 품고 龜峰에게 다음과 같이 질의한다.

人心에서 發하여 道心이 된다는 것은 괜찮으나, 道心에서 發하여 人心이 된다는 것은 온당치 않은 것 같다. 만약 道心이 人心으로 變轉한다면 곧 人慾이 되는 것이다. 보통 人心이라고 하면 역시 人慾을 겸하여 말할 수 있으나, 이 글은 朱子가 人慾을 섞어서 말한 것이 아니다.

이 질의 내용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서 栗谷의 人心道心說과 沙溪의 人心道心說의 分岐點이 되는 것이다. 즉 沙溪는 朱子를 비롯한 많은 先儒들이 모두 人心을 惡으로 보지 않는데, 유독 栗谷만이 惡으로 보는 것에 대하여 의심을 품은 것이다. 또 "道心惟微"의 문제에 대해서도 栗谷의 견해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沙溪는 龜峰에게 다음과 같이 질의한다.

道心이 發하는 것은 불이 처음 타오르고 샘물이 처음 흐르는 것 같아서 發한 것이 작다. 그러므로 微小하여 보기 어렵다.

이는 沙溪가 人心만을 栗谷과 다르게 보는 것이 아니라, 道心에 대해서도 栗谷과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栗谷은 形而上의 道義가 精微하여 알기 어렵기 때문에 道義를 위하는 情이 發하기 어려움을 말한다. 그러나 沙溪는 그 道義는 알기 어려울 것이 없이 분명하지만 그것이 밖으로 표출되는 것은 불이 처음 타오를 때 너무 미약하여 꺼지기 쉽고 일어나기 어려운 것과 같다는 것이다. 또 沙溪는 朱子의 "二者雜於方寸之中"를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저의 생각은 혹 形氣로 인해서 發할 때가 있고, 혹은 性命으로 인해서 發할 때가 있다. 兩者의 發은 모두 方寸 중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섞였다(雜)고 한다.

人心道心은 그 發의 이유가 각각 性命과 形氣에 있다는 것이다. 이 性命과 形氣는 사람의 心 속에 함께 섞여 있다가 상황에 따라 그 發의 이유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栗谷은 未發일 때 이미 두 뿌리가 있는 것처럼 되므로 不可하다 하였고, 龜峰도 不可하다고 하였다. 이처럼 두 선생이 모두 沙溪의 說을 불가하다고 하였지만 沙溪의 입장은 나중까지도 바뀌지 않았다. 그러므로 51세 때에 완성하였다는 {近思錄釋疑}에서 沙溪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朱子說은 대개 人心은 形氣를 主로 하여 發하는 것이고, 道心은 義理를 主로 하여 發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人心은 發의 主된 이유가 形氣에 있고, 道心은 性命에 있다고 하면서, 人心과 道心이 각각 形氣와 性命을 그 뿌리로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人心과 道心을 양분하는 것은 朱子나 退溪와 유사한 면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 차이는 무엇인가. 이는 四端七情과 연결하여 보아야 沙溪의 뜻을 알 수 있다.

七情 중에 그 形氣에서 發한 것을 가리키면 人心이라 하고, 그 義理에서 發한 것을 가리키면 道心이라 한다. 栗谷이 이른바 理氣를 兼하여 말하고, 氣를 주로 하여 말하지 않은 것은 바로 이를 말하는 것이다.

人心과 道心이 七情보다 先行하는 것이 아니라, 七情과 同行한다. 오히려 人心道心이 七情보다 뒤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人心道心이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情으로 發한 다음, 즉 이미 七情이 있을 때, 그 情의 發出 이유를 분석해 보면 性命과 形氣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가 엄밀하게 나눠지는 것이 아니라 대략적인 분류라고 본다. 그러므로 '主'字를 썼으며, 또 七情 중에도 理를 주로 하여 말한 것이 있고, 四端 중에도 氣를 주로 하여 말한 것이 있다고 한다.

沙溪는 理氣說에서 理와 氣는 한 순간도 서로 떨어질 수 없으며, 각 사물의 바람직한 모습인 九容과 같은 것이 理라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위의 沙溪說은 어떤 일이 자기 앞에 전개되고 있을 때, 그 상황에 맞는 자신의 덕목을 실현하고자 하는 생각에서 發한 것은 道心이고, 덕목에 대한 고려 없이 자신의 形氣에 맞춰 發한 것은 人心이라는 것이다.

栗谷과 沙溪의 心情說은 동일한 점도 있고 다른 부분도 있다. 우선 같은 점은, 첫째는 人心道心을 모두 情으로 보는 것이며, 둘째는 四七의 앞에 知覺을 설정하지 않는 것이며, 셋째는 四端은 純善한 情이고, 七情은 兼善惡으로서 情의 총칭이라는 것이다. 이 세 부분이 沙溪가 栗谷說을 受容한 주 내용이다. 다른 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栗谷은 人心道心을 動機를 기준으로 나누지만, 沙溪는 發한 후에 그 이유를 기준으로 나눈다. 둘째, 栗谷은 人心과 道心을 엄밀하게 善惡으로 나누면서 終始說을 말하지만, 沙溪는 人心을 惡으로 보지 않으며 終始說을 인정하지 않는다. 셋째, 栗谷의 善한 人心은 四端이 되지만, 沙溪의 그것은 여전히 七情이며, 道心중의 善한 것은 四端이고 惡한 것은 七情이다. 이는 栗谷이 四七을 그 결과의 善惡만을 가지고 나누는 반면, 沙溪는 결과뿐만 아니라 그 이유를 감안하기 때문이다.

Ⅵ. 愼獨齋의 心情說

愼獨齋 文集중에 性理說에 관한 내용은 매우 적은 편이다. 다만 己丑年(1649년, 선생 76세) 10월 23일 經筵에서 孝宗과 中庸序文에 관하여 講論한 기록이 자세하므로 이를 중심으로 하여 愼獨齋의 心情說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上이 金集에게 묻기를, "이 글의 懸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臣은 그 온당한 것을 알지 못합니다. 만일 천천히 읽으면 좋을 것입니다. 朱子가 젊을 때는 人心을 私欲으로 알았으나, 晩年에는 形氣에서 나왔으므로 私欲이라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 첫 번째 문답에서 人心은 人欲이 아니므로 바로 惡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이는 栗谷說과는 다르고, 沙溪說과는 일치하는 부분이다. 다음 문답에서 愼獨齋는 人心과 道心의 구분을 분명히 한다.

人心과 道心의 구분은 혹 性命에서 根源한 것과 혹 形氣에서 나온 것으로 한다. 이(性命과 形氣)는 天이 生하고 사람이 받은 것이므로 道心이 없을 수 없고, 또한 人心도 없을 수 없다. 그러므로 形氣의 私가 없을 수 없다. 朱子 晩年의 견해는 이러하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出於形氣"의 '出'字이다. 이것이 바로 愼獨齋가 栗谷이나 沙溪와 다르게 놓은 글자이다. 그 이유는 다음에서 찾아야 한다.

心에 知覺한 바가 있어서 人心과 道心 중에 모두 七情을 갖추었으니, 곧 이른바 已發이다. '진실로 그 中을 잡으라'는 것은 已發의 中이고, '치우치지 않고 기울어지지 않은 것'은 未發의 中이다. 萬事萬物 上에 人心은 없는 곳이 없으나 일을 처리할 즈음에 이르러서 지나치거나 부족함이 없는 것은 역시 道心이다. 이것은 곧 貴賤을 가릴 것 없이 마땅히 공부를 해야할 곳이다.

愼獨齋는 人心道心을 心의 知覺, 즉 對象에 대한 感知로 본다. 이 때 그 知覺이 나의 形氣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면 人心이고, 性命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면 道心이다. 즉 性命과 形氣가 각각 心의 知覺 작용에 있어서 그 주체로서 역할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人心과 道心에서 각각 原字와 出字를 사용한 것은 그 知覺樣相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그것을 구분하려는 것이다. 즉 人心의 知覺은 대상과 가까운데 있는 形氣를 통해 일어나고, 道心은 먼 데 있는 性命을 통해 일어난다는 것을 표시한 것이다. 이 知覺은 아직 情이 아니다. 情은 이 知覺의 다음에 일어난다. 사실은 이 知覺이 情을 誘發한다. 그러므로 知覺을 情의 첫머리라고도 하였다. 人心道心과 四端七情의 관계는 다음 글에서 더욱 분명히 말하고 있다.

飮食男女 등의 欲求는 모두 人心에서 나왔으나 道心도 없을 수 없다. 兩者 사이를 분명하게 辨別하여 節制하지 않으면 事事物物에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잘못을 면하지 못한다. 人心으로 하여금 道心의 명령을 듣게 하면 私欲은 깨끗이 없어지고 天理가 항상 있게 되어, 事事物物에 저절로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잘못이 없게 될 것이다.

음식이나 남녀 등과 관련된 욕구는 모두 人心에서 나온 것이지만, 이 가운데에도 도리가 있으므로 道心이 있을 수 있고 있어야 한다. 이 때 人心과 道心은 각각 七情을 유발한다. 즉 人心에서 나오는 七情도 있고, 道心에서 발원한 七情도 있다. 같은 七情이지만 그 내용이 다른 것이다. 그러나 행동으로 옮겨질 때는 반드시 道心에 의하여 人心이 절제되어 도리에 맞아야 한다. 愼獨齋는 이를 강조하고 있다.

생각건대 임금과의 문답 중에는 四端에 관한 언급은 없고 七情만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栗谷이래로 四端은 純善한 것으로서 七情에 포함된다고 보기 때문에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본 것 같다. 그런데 愼獨齋의 心情說은 위에서 다루었던 어느 선유의 학설과도 완전히 일치하지 않으며, 나름대로 독창적인 견해를 표출하고 있다. 그 유사성으로 말하면 朱子說과 가장 가깝다고 할 것이며, 단지 四端을 七情에 포함시켜 보는 것만이 栗谷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중요한 사항이 아니다. 왜냐하면 七情에 포함되든 안되든 四端이 純善한 것이라는 것은 대개 모든 선유들이 긍정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愼獨齋의 人心道心說에 입각하여 보면 오히려 四端을 七情과 구분하여 두 가지 情으로 보는 것도 가능할 것 같다. 즉 朱子처럼 道心에서 四端으로, 人心에서 七情으로 발현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분명한 언급을 찾지 못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추측컨대 愼獨齋의 위 문답은 짧은 가운데에서도 군더더기 없이 자신의 견해를 충분히 진술하고 있다. 이런 분명한 자기 견해를 가진 愼獨齋의 文集에 왜 그토록 性理說에 관한 문답이 없을까가 의문이다. 아마도 父師인 沙溪나 栗谷 등의 說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드러내 말하지 않았거나 기록으로 남기지 않은 것은 아닐까 한다. 아니면 다른 자료가 있는가를 조사해 보아야 할 것이다.

Ⅶ. 結語

지금까지 朱子를 비롯한 五賢의 心情說을 고찰하였다. 그런데 모두 朱子를 私淑하였고, 또 서로 師弟間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학설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어떤 면에서 보면 師承關係에 있다고 말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다른 점도 있다. 五賢의 心情說을 요약하는 것으로서 결론에 갈음하고자 한다.

朱子는 知覺判斷의 기준을 가지고 人心과 道心을 구분한다. 人心은 形氣之私를 기준으로 하는 주관적 평가를 한 지각이며, 道心은 性命之正을 기준으로 객관적 평가를 한 지각이다. 주관적 평가는 그 본질상 惡으로 귀결될 위험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객관적인 道心의 재평가를 통해 善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四端과 七情은 각각 道心과 人心이 誘發한 情이다.

栗谷은 다른 네 先儒와는 분명하게 다른 입장을 堅持하고 있다. 특히 朱子와 異見이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우선 人心道心은 그 內應의 動機에 따른 구분이다. 어떤 한 사물을 보고 자신의 이익을 위하고자 하는 동기를 가지고 반응하는 것은 人心이고, 道義를 실현하고자 하는 동기를 가지고 반응하는 것은 道心이다. 그런데 人心道心은 情·意를 겸하고 있는 것으로서, 처음 반응할 때는 人心이었더라도 나중에 道心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처음에 道心으로 반응하였더라도 나중에는 人心으로 변할 수도 있다. 그래서 人心과 道心은 서로 시작이 되기도 하고 끝이 되기도 한다. 한편 四端七情은 그 결과의 善惡을 가지고 나눈 것으로서 四端은 善情의 別稱이며, 七情은 善情과 惡情을 포괄하는 情의 總稱이다. 따라서 四端은 七情에 포함된다. 한편 人心과 道心, 四端과 七情은 모두 情을 분류하는 기준이다. 즉 人心道心은 善과 惡으로 兩分할 때 사용하는 기준으로서, 人心은 惡이고 道心은 善이다. 四端七情은 純善한 情과 情 전체로 나누고자 할 때 사용하는 기준으로서, 四端은 善情만을 모은 것이고, 七情은 善情과 惡情의 총칭이다.

龜峰은 對象을 知覺하여 하고자 하는 일의 종류에 따라 人心과 道心을 구분한다. 자기의 육체와 관련된 일을 知覺하여 그를 처리하고자 하는 것은 人心이고, 仁義禮智의 道義를 知覺하여 그와 관련된 일을 처리하고자 하는 것은 道心이다. 이는 私的인 일을 하려는 心은 人心이고, 公的인 일을 하려는 心은 道心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한 사람이 하는 일을 가지고 보면 公事가 많아지면 私事가 적어지고, 私事가 많아지면 公私가 적어진다. 이러한 의미에서 龜峰은 人心道心消長說을 주장한다. 물론 私事를 도모하는 人心이 바로 惡은 아니지만 그로 인해 公事를 처리하지 못하면 결국 惡이 된다. 그러므로 人心을 줄이고 道心을 늘려야 한다. 그리고 四端七情은 그 결과의 善惡에 따라 구분한다. 즉 純善한 情은 四端이고, 전체로서의 情은 七情이다. 이 부분은 栗谷과 일치한다.

沙溪의 心情說에서는 七情을 먼저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沙溪는 情, 즉 七情이 發한 이유를 가지고 人心과 道心으로 나누기 때문이다. 즉 七情 중에서 形氣 때문에 發한 것은 人心이고, 義理 때문에 發한 것은 道心이다. 사실상 沙溪는 人心과 道心에 대하여 주요한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人心과 道心을 엄밀하게 구분하려고 하지 않는다. 또 四端七情說에 있어서는 栗谷처럼 四端은 純善한 情을 모은 것이고, 七情은 兼善惡으로 情 전체라고 한다. 또 대체로는 道心은 四端에 해당하고, 人心은 七情에 해당한다.

愼獨齋의 心情說은 沙溪說을 뒤집어 놓은 것이다. 沙溪는 七情 속에서 人心道心을 나누는데, 愼獨齋는 人心道心이 각각 七情을 誘發한다. 愼獨齋는 人心道心을 情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心의 知覺으로 본다. 이 때 그 知覺이 나의 形氣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면 人心이고, 性命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면 道心이다. 즉 性命과 形氣가 각각 心의 知覺 작용에 있어서 그 주체로서 역할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루어진 知覺은 다시 七情을 誘發하여 사물에 反應한다. 七情에는 당연히 善惡의 情이 모두 있을 것이나, 四端에 대한 언급은 찾지 못하였다. 이 부분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

생각건대 위에서 다룬 五賢의 心情說은 각기 나름대로 인간이 살아가면서 마주치게 되는 도덕윤리의 문제를 검토하고, 그 해결점을 찾으려는 치열한 노력의 산물이다. 이는 시대를 초월하여 현대의 우리에게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며, 앞으로 이런 치열한 철학정신을 본받아 오늘의 우리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心情說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善行을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 先行해야 하는 이론이다. 그 이론에 따라 修養方法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朱子는 惟精惟一하여 道心常爲一身之主할 것을 수양방법으로 중시하며, 栗谷은 즉각적인 반응에서 濁氣가 用事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矯氣質을 중시한다. 愼獨齋는 性命이 知覺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省察할 것을 말한다. 선생의 號인 '愼獨'도 여기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어떤 장단점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고찰하는 것이 다음 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1. 金長生·金集, {沙溪·愼獨齋全書}, 서울, 光山金氏文元公念修齋, 1978.

2. 宋翼弼, {龜峰先生文集}, 서울, 民族文化社, 1980.

3. 李珥, {栗谷全書}, 서울, 成大 大東文化硏究院, 1978.

4. 宋時烈, {宋子大全}, 서울, 斯文學會, 1971.

5. {經書} ([大學]·[論語]·[孟子]·[中庸]), 서울, 成大 大東文化硏究院, 1979.

6. 拙稿, [栗谷 四七論의 現代的 解釋], {東洋哲學硏究} 第19輯, 東洋哲學硏究會, 1998. 12.(pp.121∼147)

7. 拙稿, [沙溪 金長生의 哲學思想], {沙溪思想硏究}, 沙溪·愼獨齋 兩先生紀念事業會, 1991.(pp.263∼296)

沙溪禮學派의 禮學思想

- 禮問答書의 分析을 중심으로-

한 기 범 (한남대)


<목 차>




Ⅰ. 머리말

Ⅱ. 沙溪禮學派와禮問答書

Ⅲ. 沙溪禮學派의 禮學思想

Ⅳ. 맺음말



Ⅰ. 머리말

한국사에 있어서 17세기는 혼란과 격동의 세기였다. 임진왜란(1592-1598)의 상흔이 아직 채 가시기도 전에 시작된 이 17세기는 仁祖反正과 정묘·병자 胡亂, 禮訟과 거듭된 政治的 換局이 차례로 발생하여 정치적 사회적 불안이 계속되었고, 특히 동아문명의 상징이던 明나라가 오랑캐인 淸나라에게 망함으로써 小中華를 자처하던 조선사회에 엄청난 가치관의 혼란이 야기된 시기였다. 또한 이 시기는 전 세계적으로 小氷期的 자연 재해가 극심하여 생존 자체에 심각한 위협이 수반되었던 이른바 '危機의 時期'이기도 했다. 이렇게 불안한 시대적 상황은 자연히 조선의 정치 사회에 심각한 '價値觀의 혼란'을 야기시켰고, 따라서 기존 가치의 재정립이나 새로운 가치의 창출이 시대적 과제로 부각되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를 살았던 조선의 지식인들은 주어진 시대적 상황과 과제에 대해서 어떻게 思考하고 대응하였을까?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하나의 사실은 17세기가 '禮學의 時代'로 인식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당시대인들의 시대적 과제에 대한 대응이 대체적으로 어떤 방향의 것이었는지를 암시하며, 또한 당시대의 학문풍조가 이론적 性理學의 극성에 뒤이어 자연스럽게 실천적 학문으로서의 禮學에 집중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할 때, 우선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것은 山林의 예학과 예학사상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다. 17세기의 학계와 정치계를 주도하였던 주체는 다름 아닌 산림세력(山林勢力)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고에서 살피고자 하는 이 시기의 '沙溪禮學派의 禮學思想'은 학파의 주체가 당대의 山林의 宗匠들이고 그 내용이 朝鮮禮學의 수립과 禮秩序의 정립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위의 문제의식과 별개의 것일 수 없다.

사계예학파는 沙溪 金長生과 그의 嫡傳 門人 및 손자 문인들에 의하여 17세기의 湖西地方에서 형성되었던 전문적인 禮學硏究派에 대한 칭이다. 이들은 17세기 조선의 禮學時代를 주도하고, {家禮}에 대한 치밀한 연구를 바탕으로 하여 '朝鮮禮學'을 이루는 데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 禮家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가 湖西山林들이었다는 점에서 또한 이들을 '湖西禮學派'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들 사계예학파의 특징적인 예학 경향의 하나는 禮問答書의 繼述에 있다. 예문답서는 禮書의 내용에 대한 의문점이나 예서에는 빠져 있지만 예실천에 있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變禮的 문제들에 대한 禮問答을 모은 예서이다. 따라서 예문답서는 당시 사대부들의 예의식과 윤리의식은 물론 시대의식과 문화의식을 반영하고, 또한 이에 관련된 예학자의 예학사상을 종합적으로 드러내 주는 예서라 할 수 있다. 특히 예문답을 주도한 예학자가 일세의 정치와 학문과 사상을 주도하였던 山林들인 경우에는 그 예문답서에 대한 기대치는 그만큼 더 커질 수 있다. 본고에서 살피고자 하는 禮問答書를 제작해 낸 禮家들이 바로 그러한 인물들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필자는 세대별로 당대의 대표적 山林으로 활약한 金長生- 金集 -宋時烈 -尹拯 등 사계예학파의 禮問答書들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동안 이들 예서에 대한 연구는 부분적으로는 이루어져 왔으나 전체적으로 검토되지는 못하였다. 본고에서는 이들 예문답서를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17世紀 沙溪禮學派의 예학사상과 그 성격을 정리하고, 나아가서 이러한 禮學思想이 당시의 시대의식이나 시대적 과제 및 새로운 문화인식 등과는 어떠한 내적 연관을 지닐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약간의 試論的 檢討를 덧붙여 보고자 한다.

Ⅱ. 沙溪禮學派와 禮問答書

1. 沙溪禮學派

조선의 성리학은 16세기에 퇴계와 율곡의 활약에 힘입어 주자성리학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갖게 되었고, 나아가서 이이의 '理通氣局說'과 같은 조선적인 성리설이 수립되어 조선성리학 시대를 맞게되었다. 따라서 16세기 말엽에는 이제 자연스럽게 성리학의 실천학으로서의 禮學이 주목되기 시작하였다. {가례} 주석서로서의 四禮書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이 시기의 예학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곧 단순한 行用으로서의 禮로부터 認識으로서의 禮로의 轉換을 의미한다. 이제는 단순한 관습적 禮行에 만족하지 않고, 그 예를 왜 행해야 하는가에 대한 성리학적 이해까지를 얻고자 했던 것이다. 이제는 예에 대한 기본 인식과 실천의지가 달라지게 된 것이었다. 認識을 바탕으로 하는 예는 막연한 관습적 예 실천 보다 더 합리적인 것이라고 믿어졌고, 확실한 인식이 바탕이 되었다면 그것에 대한 보다 철저한 실천이 강조되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예에 대한 기본 인식이 달라지는 전환기에 그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학파가 곧 사계예학파였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沙溪禮學派'는 조선예학의 태두인 金長生과 그의 嫡傳 門人(손자 문인 포함)들에 의하여 17세기의 湖西地方에 형성되었던 전문적인 예학연구파에 대한 이름이다. 이들은 17세기 조선의 禮學時代를 주도하고, {家禮}를 완성하여 조선적인 성격이 강한 朝鮮禮學을 이루어 냄으로써 조선의 대표적인 예학파가 되었다. 이러한 사계예학파의 학문적 연원과 특성은 무엇이며, 학파의 형성을 가능케 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연원적으로 볼때, 사계예학파는 栗谷 李珥를 종장으로 하는 畿湖學派의 嫡傳的 학맥이다. 기호학파는 16세기 후반 이이·성혼·송익필 등을 중심으로 하여 수립된 京畿와 兩湖를 대표하는 성리학파로서, 특히 道統意識이 중시되어 그 학문적 연원이 孔孟- 朱子의 도통적 학맥으로까지 소급되는 경향이 강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17세기의 사계예학파에 이르러 더욱 강조되어 가히 학파의 특색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즉 사계예학파에서는 도통의 정맥인 朱子를 절대 존신하는 입장이었던 데 반하여 영남학파의 정구의 {五先生禮說分類}에서는 주자를 다만 송조 5선생의 한 사람으로만 인정하였고, 또 5선생의 선정에서도 道統에서 제외되었던 司馬光을 포함시킨 사례 등에서도 확연히 대조를 보이고 있다

16세기 말에 왕성한 학문활동을 하였던 이이와 송익필은 사계예학파의 형성에 그 이론적 바탕을 제공한 학자들이었다. 김장생의 [年譜]에 의하면 그는 13세에 宋翼弼에게 나아가서 四書와 {近思錄} 등을 배웠고, 20세에 李珥에게 나아가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다. [沙溪年譜]의 20세의 기록에 "李先生이 海州로 돌아감에 따라 들어가 門下에서 더욱 禮學에 精進하여 節目이 모두 갖추어져 크고 작은 것을 다 이루었다"라 한 것을 보면 그의 본격적인 예학 공부가 율곡에게서 출발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그가 {家禮輯覽}序에서 "내가 어려서부터 家禮를 읽다가 그 밝게 알지 못함을 병으로 여겨 友人 申義慶과 여러 해 동안 논의하고, 또 師門에 나아가 지도를 받고 그 대개의 뜻을 이해하였다".라 한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이이로부터의 직접적인 학문전수는 이후로도 꾸준히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율곡은 문인 교육에서 항상 "博文·約禮 이 두 가지는 성현의 학문에 있어서 수레의 두 바퀴와 같고, 새의 양 날개와 같다"라고 가르쳤다 한다. 그러나 훗날 김장생은 이러한 스승의 학문적 업적에 대해 스승의 博文(理論의 學)의 공은 최고이지만, 約禮(實踐의 學)의 문제는 아직 과제로 남겨진 바가 있다고 평가하였다. 이것은 그가 스승 李珥가 못다 이룬 約禮의 과제를 그 자신이 맡아야 할 책무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특히 그것은 학통상의 연원이 되는 朱子의 {家禮}가 未完의 禮書였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은 듯 하다. 즉 {가례}의 완성이 곧 도통적 예학을 완성하고, 스승 이이의 '約禮'의 과제를 해결하는 첩경이라는 인식을 갖게 하였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율곡의 이러한 '博文約禮'의 가르침은 김장생에게 예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해야 할 동기를 일깨워 준 것이 분명하다 하겠다.

이이는 {擊蒙要訣}·{祭儀抄} 등의 예학관련 저술과 친구 문인들과의 예문답(그의 [語錄]에 보인다)을 통해서, 約禮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國事의 多忙함과 그의 短命 등의 이유로 인해 그의 예학에의 공은 성리학에서의 그것에 미치지 못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이이는 김장생에게 예학을 가르치고 예학연구의 동기를 제공하였으며, 또한 疑禮의 해명작업에 중요한 스승이었고, 훗날 사계예학파의 예문답에서도 여러 경우에서 그들의 예설적 판단의 기준이 되었다.

한편 김장생에게 {가례}연구의 구체적 방법을 제시해 준 스승은 구봉 송익필이었다. {年譜}에는 13세시에 구봉에게나아가 受學한 記事 외에, 36세시에 김장생이 송익필에게 小祥練服에 대한 질문을 한 기사가 있고, 그의 {禮問答}에는 이를 포함하여 2건의 예문답이 수록되어 있다. 송익필은 또한 그에게 예정신의 기초로서 直의 정신을 가르쳐 주었고, {가례}에 대한 연구 방법을 선행연구로써 제시해 주었다. 송익필의 가례 주석서인 {家禮註說}과 예문답서인 {禮問答}등은 후일 김장생의 {가례집람}과 {의례문해}의 작성에 상당한 긍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이해된다. 결국 김장생은 이이로부터 '博文 約禮'의 예학적 동기를 제공받았고, 그 문하에서 예학의 大小 節目을 두루 익혔으며, 송익필로부터는 예정신의 기초인 直의 사상과 함께 {家禮}의 연구방법을 터득하였다고 하겠다.

초기 기호학파의 핵심인 이이 송익필 성혼 등은 모두 경기 출신이고, 또한 서울 경기지역을 중심으로 그들의 학문과 정치활동을 전개하였으므로, 자연히 학파의 중심이 京畿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이의 적통이 湖西의 김장생에게로 이어지고, 김장생의 학문활동이 향리인 忠淸道 連山에서 적극적으로 행해지면서부터 기호학파의 중심은 급격히 경기에서 호서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후의 기호학맥의 적전은 김장생- 김집- 송시열 등 모두 湖西에서 배출되었고, 또한 논란의 쟁점을 이룬 학문 경향도 역시 性理學 중심에서 禮學 중심으로 바뀌게 되었다.

김장생이 호서에서 적극적인 문인 교육을 시작하게 된 것은 1613년(광해군5)의 癸丑獄事와 관련된다. 이 옥사에는 그의 庶弟 경손과 평손이 연루되어 그는 철원부사직에서 축출되어 향리인 連山으로 돌아왔다. 김장생은 이후 1623년 인조반정으로 재출사하기까지 거의 10년 동안을 이곳에 칩거하면서 학문연구와 문인교육에만 전심하게 된다. 김장생은 反正 이후에 조정에 出仕하고서도 대개는 그의 고향 연산에서 은거하였다. 따라서 연산에서의 그의 문인 교육은 계속되었고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그의 門人集團이 형성되었으며, 이들에 대한 예학교육도 여기서 그 기초작업이 이루어 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사계예학파의 예학 교육은 그의 적전을 계승한 門子 金集을 통해서 계속되어졌으며, 이러한 이들 父子의 禮敎育을 정통으로 이어 받은 인물들이 바로 회덕의 송시열(1607-1689)과 송준길(1606-1672), 그리고 이유태(1607-1680)였다. 사계는 이들 3인에게 특별히 예학적 과제를 당부하였으니 다분히 학파적 색채가 드러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이들 3인은 김장생의 작고 후 다시 김집의 문하에서 공부를 마쳤으며, 또한 錦山의 兪棨, 尼山의 尹宣擧·尹拯 등은 모두 김집의 문하에서부터 사계 예학의 학문적 전통을 수학하였다. 이들 사계예학파는 모두 호서인이었고, 그들의 학문전수와 학문활동은 주로 호서에서 이루어졌다. 이들의 지역적 배경은 뿌리가 매우 깊고 견고한 것이었다. 김장생 김집을 배출한 연산의 광산 김씨는 이미 조선초기에 이곳에 입향하여 세거하면서 좌의정(김국광)·대사헌(김계휘) 등 고관 대작을 배출하였고, 송시열 송준길 등을 배출한 회덕의 은진 송씨 역시 회덕의 토성인 懷德黃氏의 外孫家로서 회덕에서의 在地士族的 基盤이 튼튼하고 또한 송인수 송기수 등 저명한 관인 유자를 많이 배출하였으며, 윤선거 윤증을 배출한 이산의 파평 윤씨 역시 牛溪 成婚의 外孫家로서 가계적 배경이 특출하고 16세기 중엽 이래 尼山(지금의 충남 논산시 노성면 일원)에서 세거하면서 재지사족으로서의 확실한 기반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7세기 중엽에 이르면 이들 3대족은 이미 '湖西의 三大族'으로 칭해지고 있었다.

사계예학파의 학파 형성은 학문적으로는 철저한 禮學敎育과 禮問答, 그리고 禮書의 共同 校訂 및 刊行 작업 등을 통하여 그 기틀이 이루어졌다. 사계예학파의 학문연원인 기호학파의 학문경향에 대하여 뚜렷한 변화를 보인 것은 학문의 중심이 성리학 중심에서 예학 중심으로 옮겨지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이이는 기초적 經書로 四書를 가장 중시한데 반하여 김장생은 {小學}과 {家禮}를 가장 중시하였으며, 송시열도 그러한 스승 김장생의 입장을 존중하였다. 실제로 송준길과 이유태 송시열 등이 입학 초기부터 김장생으로부터 {가례} 교육을 받고 있었음은 앞에서 살핀 바와 같다. 또한 김집 역시 문인교육에서 우선적으로 禮를 강의하여 문인 중에 四禮에 대해 깨우치지 못한 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등은 김장생의 {의례문해}와 김집의 {의례문해속}에서의 예문답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그들 스스로가 방대한 예문답서를 제작하였으며, 또한 김장생의 사후에는 문인들이 함께 논의하여 {의례문해} 등 스승의 예서를 교정하였다. 사계예서에 대한 문인들의 이러한 공동 교정 작업은 이미 김장생의 기대가 있었던 바이니 그가 문인들에게 합력하여 다른 예설들의 잘못을 바로 잡아라고 했던 데서 이를 집짐작할 수가 있다.

이들 3인은 또한 양선생이 작고한 후에 빚어진 禮訟에서 宗支爲主의 정통론적 종법론으로 天下同禮的인 禮론을 주장하게 됨으로써 학파적 색채를 더욱 뚜렷이 하였다. 물론 이때의 예송에서 윤선거는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유계 등과는 다른 입장을 표명하여 예설상으로 대립되었고, 또한 윤증은 '懷尼是非'를 계기로 하여 스승인 우암 송시열과 확실히 결별하여 분파적 양상이 발견된다. 그러나 윤선거의 예설 문제는 종법론쟁에 국한될 수 있는 것이고, 윤증의 경우는 그가 뒤에 沙溪의 {喪禮備要]를 교정하여 중간하고, 또 신독재의 {疑禮問解續}을 교정하고 발문을 짓고, 또 자신의 예문답서인 {疑禮問答}의 체제를 사계의 {疑禮問解}를 준하고 있는 사실 등을 고려한다면 이들 역시 사계예학파의 일원으로 분류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사계예학파의 특징인 예문답서의 계술적 양상을 가지고 말한다면 이러한 사계예학파의 학파적 下限은 아마도 尹拯의 代에서 일단락 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2. 禮問答書

禮問答書는 예서의 내용 중 의문나는 문제나 예서에 구체적으로 명기되어 있지 않은 실 생활상의 變禮的인 문제들을 문답식으로 풀이한 예설집이다. 따라서 그것은 다른 예서들에 비하여 평이하고 실용성이 높은 예서라 할 수 있다. 예문답서에는 {家禮}와 古禮는 물론, 國制와 俗禮, 그리고 중국과 조선의 저명한 예서와 예가의 예설들이 두루 소개되어 있으며, 이에 대한 당시 예가들의 예설적 견해가 사실적으로 나타나 있고, 또한 당시인들의 예생활적 갈등과 이에 대한 적극적인 해결 의지가 함께 담겨져 있다. 따라서 예문답서는 당시의 禮學과 禮思想 및 禮生活史를 연구하는 데에 매우 긴요한 연구 자료가 되며, 특히 그 예문답의 내용상의 복합성과 다양성으로 인해 당 시대의 예의식은 물론, 문답에 응하는 예가들의 예학사상이 종합적으로 잘 드러나 있는 예서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 사계예학파의 예문답서는 대를 이어서 계술적으로 편찬되어 왔고, 또한 그 분량도 방대하다. 이들의 대표적인 예문답서로는 김장생의 {疑禮問解}, 김집의 {疑禮問解續}, 송시열의 {禮疑問答}, 윤증의 {疑禮問答} 등이다. {의례문해}는 본문 7권과 {의례문해습유}1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 퇴계의 예문답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喪祭禮問答辨疑]에는 34개 조문의 문답만 들어 있는데, 변의의 다수가 이미 {의례문해}에 수록되었으므로 중복해서 수록하지는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의례문해속}은 김집이 김장생의 {의례문해}를 모범으로 삼아서 그 빠진 부분에 대해서 보완적으로 편찬한 예문답서이다. 김집은 {의례문해속]의 체제를 {가례}의 편차를 따른 父師의 그것에 일치시키고, 내용도 서로 중복을 피하여 편집하였으므로 양서는 실은 하나의 예서가 되는 셈이다. {의례문해]는 효종조에 일차 간행되었고, 얼마 후 兩 禮問答書를 합쳐서 다시 간행되었는데, 그 발문을 윤증이 썼다. 양 예문답서에는 예문답이 각각 543건, 151건이 수록되어 있고, 상제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한편 송시열의 {禮疑問答}은 그의 {經禮問答}의 일부로서 편집되어 있으나 그 분량이나 내용을 보면 따로 독립하여 충분히 一書를 이루고도 남을 만한 것이었다. 예문답은 986건이 상제례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윤증의 {疑禮問答}은 가례의 사례 이외의 예문답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송시열의 {예의문답}과 윤증의 {의례문답]의 체제와 구성은 앞의 예문답서들과는 상당히 다른 데가 있다. 전자의 예문답서들에는 {가례}에 준하여 다만 관혼상제의 四禮만 다루고 있으나, 후자의 경우는 체제가 자유롭고 특히 [王家(朝)禮] [學宮禮] [國恤中私儀] [禮書疑義]등의 예문답을 함께 다루고 있다. 예문답서에서의 예문답의 영역이 더 확대되는 이러한 경향은 당시인들의 예인식이 점차적으로 王朝禮와 家禮를 동일시하려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음을 보이는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지 않나 한다.

참고로 이들 사계예학파의 대표적 예문답서를 비교해 보면 대개 다음과 같다.

<표 참조>



사계예학파의 예문답서의 비교

분류

총목

의례문해

(김장생)

의례문해속

(김집)

예의문답 (송시열)

의례문답 (윤증)

전 체

가례(四禮)

전체

가례(四禮)

가례

가례도

통례

관례

혼례

상례

제례

8( 1.5)

69(12.7)

6( 1.1)

12( 2.2)

385(70.9)

63(11.6)

1( 0.7)

18(11.9)

2( 1.3)

106(70.2)

24(15.9)

6( 0.6)

158(16.0)

22( 2.2)

68( 6.9)

594(60.2)

115(11.7)

6( 0.6)

158(16.4)

22(2.3)

68(7.1)

594(61.7)

115(12.0)

1( 0.1)

91(13.4)

26( 3.8)

38( 5.6)

362(53.3)

65( 9.6)

1(0.2)

91(15.6)

26( 4.5)

38( 6.5)

362(62.1)

65(11.1)

543(100)

151(100)

963(97.7)

963(100.1)

583(85.8)

583(100.2)

가례 외

왕조(가)례

향례

학궁례

기타



10(1.0 )

3(0.3 )

7(0.7 )

3(0.3 )


9(1.3)





23(2.3)


9(1.3)


國恤中 私禮

국휼중 사례





30(4.4)


禮書疑義

예서의의





57(8.4)


합계


543(100%)

151(100%)

986(100%)


679(99.9)


* 이 표는 다음의 論文들을 참고하여 再構成 한 것이다.

韓基範, 沙溪 金長生과 신독재 김집의 禮學思想, 충남대 박사학위논문, 1991. 2

裵相賢, 朝鮮朝 畿湖學派의 禮學思想에 關한 硏究, 고려대 박사학위논문, 1991. 8

李迎春, 제7회 沙溪 愼獨齋 禮學思想 學術發表會 發表要旨, 沙溪 愼獨齋 兩先生 紀念事業會, 1996.

韓基範, [明齋 尹拯의 禮學思想], {明齋 尹拯의 生涯와 思想}, 忠南大 儒學硏究所, 2001.

Ⅲ. 沙溪禮學派의 禮學思想

1. 道統 繼承的 禮認識 - {家禮}와 古禮의 尊信-

사계예학파의 학문연원은 栗谷 李珥를 종장으로 하는 기호학맥이고, 그것은 다시 孔孟-朱子에까지 소급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기호학파의 강한 道統意識에 기인하는 것이다. 김장생은 일찍이 우리나라의 道統이 鄭夢周-金宏弼-趙光祖-李滉-李珥 등에 의해서 이어져 왔다고 인식하고, 그러나 그 大脈은 趙光祖-李滉-李珥며, 특히 '그 道脈을 무궁케 하신 이는 李珥 뿐'이라 하여 李珥의 도통적 功이 가장 큰 것으로 말한 바 있다 연원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는 孟子이후에 중단되었다가 宋代에 와서 재건된 道統의 嫡統이 朱熹에서 바로 李珥로 이어진다는 관점이며, 동시에 김장생 자신이 주자-율곡으로 이어져 온 도통을 自任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긴 표현으로 해석될 수 있다.

송시열은 이러한 우리나라의 도통적 연원을 확실하게 공자-주자-율곡-사계로 연계하였다. 이것은 송시열이 자신의 학문연원인 기호학파의 도통적 정통성을 확고하게 천명한 그의 도통관이 집약된 표현이다. 여기에는 정치적 환국기에 고난에 처해있던 그 자신의 산림의 영수로서의 고뇌와 갈등이 도통적 자부심으로 반영된 부분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이이는 주자의 학문을 극히 존중하는 입장이었고, 또 평소에도 문생교육에서 항상 공자의 '博文 約禮'를 강조해 온 사실이나, 이러한 내용들이 김장생의 {語錄}에서 나온 것임을 고려한다면, 송시열의 이러한 道統認識은 또한 이이와 김장생의 도통관과 상당한 공유성을 지니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이들의 도통관은 사계예학파의 {가례}중심적인 예학연구의 경향과도 바로 직결되는 것이었다. 김장생의 사후 송시열은 스승의 文廟從祀를 위해 올린 상소문에서

김장생은 程朱의 학문을 李珥에게 배워 터득했습니다…… 뒤에 朱子가 禮書의 不備를 한탄한 것을 슬프게 여겨 晩年에 禮書의 연구에 전념하였습니다. 勉齋 黃幹의 禮書에 오히려 유감된 점이 있어서 다시 검토 裁制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라 하였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그가 사계예학파의 도통적 학맥을 주자의 {가례}에 연관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사계예학파의 입장에서 볼 때, 주자의 {가례}는 곧 畿湖學派의 道統的 淵源의 禮書, 곧 道統的 禮書가 되는 것이다. {가례}는 주자학의 풍미와 함께 四禮硏究書로는 이미 최고의 권위를 얻고 있는 예서였으므로, 도통적 예서로 보아도 무방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면 사계예학파의 예문답서들에서는 이러한 {가례}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인식되고 있었을까? {가례}는 {주자대전} {주자어류} 등에 나오는 주자의 예설과 함께 예문답에서 가장 尊信되었고, 그 예설의 인용횟수도 단연 다른 예서와 예설을 압도하였다. 특히 그의 주자의 예설에 대한 평가는 극히 긍정적이었다. 김장생은 그의 {의례문해}에서 '所後者가 父在中母喪에 복제를 期服으로 강복할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가 {가례}와 楊註가 서로 다른데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질문을 받고, "楊註를 가례와 더불어 一例로 보아서는 안된다. 주자의 {가례}는 時王之制이니 마땅히 행해야 한다" 라여 주자의 예제를 時王之制로 인식하고 그 입장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또한 송시열은 {예의문답}에서 '비록 {의례}와 {예기} 등에 근거가 없다 하더라도 {家禮}는 주자가 古今을 참작하여 禮制로 정한 것이므로 가히 따르지 않을 수 없다' 라 하여 주자의 예설을 크게 우선시하였고, 심지어는 주자의 예설을 따르지 않는 것을 夷狄視하기 까지 하였다. 그의 이러한 인식에는 전통적인 道學의 集大成者가 주자이고 주자는 완벽한 道學者로서 그의 학설에 하자가 있을 수 없다는 평소의 신념이 작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사계예학파에서는 朱子가 孔孟의 학맥을 嫡統으로 계승하여 도통적 예학을 집대성한 예학자이고, 주자의 {家禮}가 이러한 도통적 예학의 基本的 禮書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주자의 예사상과 {가례}에 대한 尊信과 繼承을 예학연구의 우선으로 삼았다. 이렇게 {가례}가 가장 중시된 것은 물론 주자의 성리학적 위상에서 오는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이나, 이를 예학적으로 보면 그것은 {가례}가 近世인 宋代社會의 禮制라는 時宜性과, 송대사회가 사대부 중심의 사회이고 당시의 조선이 또한 그와 유사한 사회구조이며 {가례}가 바로 그러한 사대부의 예를 집대성한 것이라는 현실적 적합성에 기초한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도통적 예학 중에서 {가례}가 가장 주목을 받고 중시되었던 것은 {가례}의 시의성과 실용성이 중시된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음으로 검토하고자 하는 것은 이들의 도통적 예학으로서의 古禮에 관한 인식이다. {가례}는 고례에 비해 훨씬 더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예제를 갖추고 있었지만, 그것은 주자가 초년에 작성한 후 분실하여 미처 교정을 보지 못한 미완성의 예서였다. 이러한 가례의 불완전성은 불가피하게 {가례}의 문제가 되는 예설들과 빠진 부분들에 대한 제 예설은 그 도통적 원류인 古禮에 의해 검증을 거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당시 사계예학파에서의 예학 목표인 {가례}의 완성은 결국 朝鮮的 家禮의 정립에 목표를 둔 것이었으므로 조선적인 가례의 제 문제들에 대한 예학적 검증이 또한 필요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 國制와 俗禮는 물론 조선적 道統으로 인식되어온 조선 禮家들의 예서와 예설들도 모두 {家禮}와 古禮로써 再論되고 檢證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이로써 가례에 관한 조선 예학의 일대 재정비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가례}와 가례적 제문제에 대한 고례적 검증 작업에는 도통적 고례의 기본서이며 그 내용이 가례와 유사한 {儀禮}와 그 이론서인 {禮記}가 주로 활용되었다.

김장생은 광해군 5년(1613) 이황의 {喪祭禮問答}이 간행된다는 말을 듣고 이황의 문인인 정구에게 글을 보내서 "공주에서 판각한 {상제례문답}은 古禮에 합당하지 못한 바가 있습니다. 老先生(이황을 지칭함, -필자)이 隨問隨答하여 考證에 이르지 못하여 이와 같은 데에 이른 것 같습니다(하략)" 라 하여 정구가 대신 교정을 할 것을 권면하는 글을 보내고 있다. 그가 가례의 고례적 검증을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알 수가 있다. 또한 김집은 김장생의 {疑禮問解}를 간행하고자 할 때 그 序文을 김상헌에게 부탁하였는데, 이때 그 글에서 "이 책은 {儀禮}와 {禮記}로서 결단한 것이기 때문에 증거할 바가 있으므로 變禮와 의문난 일에 처했을 때 가히 禮學者의 指南이 될 것입니다" 라 하였다. 이를 보면 전날 김장생이 정구에게 교정을 당부하였던 그 고례도 역시 {의례}와 {예기}를 지칭한 것이 분명한 것 같다. 이로써 보면 이들 고례의 예사상이 사계예학파의 예학사상에 미친 영향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가히 알 수가 있고, 또한 사계예학파의 예학사상이 기본적으로 이러한 고례적 바탕위에 서 있는 것임을 다시 한 번 확인케 된다.

사실 禮問答書는 變禮의 문제들이 그 내용의 주류를 이루고 있으므로 상당부분이 古禮로써 檢證을 요하는 문제들이었고, 明文이 있고 禮의 本意에 관한 한 대체적으로 고례가 존중되었다. 예컨대 김집이 奉祀孫의 선정에 대한 문답에서 "宗法에 長子를 세우는 것은 不易의 禮이다"라 한 것이 그런 류이다. 이러한 검증 작업에는 또한 중국의 역대 법전과 제 예가의 예설이 망라되기도 하였으나 역시 {의례}와 {예기}의 인용횟수가 가장 많다.

마지막으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조선의 道統的 禮家의 예설들에 대한 예인식이다. 김장생에 의하면 조선적 도통은 그 계보가 조광조-이황-이이 등인데 이들 중 예학에 가장 전심한 인물은 이황이다. 김장생은 이이로부터 예학적 동기를 부여받았고 또한 예문답에서도 그의 예설을 20여회 이상 인용하고 있지만, 이황의 예설에 대해서도 [상제례문답]에 대한 철저한 고증을 더하여 [상제례문답변의]를 지었고, 예문답에서도 그의 예설을 가장 많이 인용하였다. 물론 그것은 수용보다는 비판적 입장이 더 주조를 이루는 것이지만, 그 분량이나 내용의 밀도를 볼 때 결코 심상한 일이 아니며 이는 이황이 사계예학파의 예학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곧 사계예학파의 예학이 도통적 예학으로서의 고례와 {가례}를 계승하고 나아가서 우리나라 도통적 학맥의 예가의 예설까지 비판적으로 수렴하는 과정을 거쳐 이룩된 도통계승적 예학의 집성이었음을 의미한다.

사계예학파의 예문답서들에서는 후대로 내려올수록 고례에 대한 의존 보다는 오히려 조선 예가들의 예설을 인용하고 이에 의거하여 자신의 예설을 전개하는 경향이 더욱 증대되었다. 그것은 그간의 조선예가들에 의한 고증적 연구가 그만큼 진척되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또한 자주적인 예인식의 경향이 보다 증대되는 현상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 한다. 따라서 18세기에 있어서의 조선중화주의가 오랑캐에게 망해버린 명을 대신하여 조선이 그 문명의 담당자로서 자임할 수 있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17세기 사계예학파의 이러한 예학적 과업은 그 하나의 튼튼한 기초를 이루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2. 合理性·實用性의 추구와 俗禮의 調和的 수용

사계예학파의 {家禮}에 대한 완성 작업은 1차적으로는 그들의 도통적 예학의 완성이라는 학맥적 과제와 연관되는 것이었지만, 종국적으로는 '朝鮮家禮의 定立'으로 귀결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었다. 古禮나 {가례}는 時宜性과 地域性을 고려할 때 자연히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고, 그나마 {가례}는 朱子의 未完成의 禮書였으므로, 조선의 國制와 俗禮 및 조선예가의 禮書와 禮說 등이 폭넓게 검토되어져야 했다. 이것은 주자의 {家禮}가 기본적으로 {儀禮}를 기본으로 삼았으나 그 내용의 반은 주자시대인 宋代의 時俗으로 구성되었던 것과 같은 원리의 것이었다.

사계예학파는 예문답을 통해 國制와 俗禮를 검증함에 있어서 {가례}와 고례에 1차적인 기준을 두고, {通典}, {國朝五禮儀} 등 역대 禮制들이나 저명한 예가의 예서나 예설에 관계 내용이 있으면 이로써 전거를 삼았다. 그러나 그 내용들이 상호 모순적이거나 그 전거가 불분명할 경우에는 예의 기본 원리인 情禮와 時宜에 합한 것인지의 여부를 판단의 주요 기준으로 삼았다. 情禮는 禮出於情의 '情'과 그 뜻이 예정신에 부합되는가의 合禮의 '禮'이니 人情과 合理性의 문제이고, 時宜는 그 禮制가 때에 알맞는 것인지의 문제이니 곧 실용성을 고려한 時宜性의 문제인 것이다. 이것들은 곧 예 실천의 기본 정신이 되는 것이었다. 일찍이 송익필도 김장생의 예정신이 情禮에 합한 것이라 하여 찬탄한 적이 있었다. 따라서 변례의 제문제들을 정례와 시의에 맞게 재정립하여 새로운 예질서으를 수립한다는 것은 한다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變禮는 그 형태가 다양하고 예외적 변수가 많아서 그 판단은 고도의 예학적 수준에 이르고서야 가능한 것이었다.

예문답서에 수록된 사계예학파의 俗禮에 대한 검토는 고례나 {가례} 등을 근거로 하여 속례를 비판하고 부정하는 예설도 없지는 않았지만, 대체적으로는 속례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었다. 속례에 대한 사계예학파의 긍정적 인식은 대개 속례의 관용적 수용, 國制·俗禮 古禮의 조화적 수용, 속례에 대한 自矜的 解釋과 적극적 수용 등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속례에 대한 비판보다는 관용적 수용인식이 주조를 이루고 있었다. 사계예학파의 예문답들에서는 대체로 속례가 기본 예법에 비추어 큰 문제가 없는 것은 그 관행을 거의 그대로 인정하였다. 그리고 예서나 선현의 예설로써 입증할 수 없는 속례에 대해서도 人情에 후하고 실용적인 것이면 그대로 인정하거나 저명한 禮家나 名門 大家의 自家禮로써 기준을 삼아 시행하였다. 물론 俗禮가 전통적인 예서의 규정이나 선현의 예설에 분명히 모순되고 그것이 예의 기본정신에도 위배될 때는 속례를 따르지 말도록 권면하였지만 그것은 주로 종법 규정에 관한 것이었으며, 대체적으로는 속례에 대한 극단적인 부정이나 비판보다는 현실적으로 속례를 인정하고, 다만 현행의 방법보다는 더 예 정신에 합당한 방안을 제시하는 선에서 그치는 경향이 더 지배적이었다.

둘째, 國制·俗禮 古禮의 조화적 수용인식이 강조되었다. 이들은 대체적으로 국제와 속례 고례의 상충되는 예설에 대해서는 情禮와 時宜를 고려하여 조화롭게 수용하려는 입장이었다. 김집은 그 문인이 "長子의 庶子가 宗祀를 받들 수 없어 次嫡에게 넘겼습니다. 이것이 禮法에 맞는지요?"라는 질문에 대해 "古禮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우리 나라의 法이 그러하다."라고 대답하였다. 이것은 長子에게 庶子만 있고 嫡子가 없을 경우(有庶無嫡), 조상의 제사를 서자에게 맡길 수가 없어서 次嫡에게 移宗하였는데 이것이 禮法에 맞는가 라는 질문이었다. 이에 대해 김집은 '庶子가 承重할 수 없다'는 것은 古禮의 원칙이 아니고, 다만 당시의 朝鮮의 法制({經國大典} 禮典 奉祀條)가 그러할 뿐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그러나 김집은 적극적으로 國制를 비판하거나 그 개선을 강조하기 보다는 다만 이에 대한 고례적 원칙을 제시하는 데 그치고 國制의 규정을 묵인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國制가 古禮 혹은 俗禮와 대립될 경우 대개는 이와 같이 국제를 묵인하는 입장이 더 많았다.

다음은 國俗과 古禮와의 조화적 수용의 사례를 보인 경우이다.

[문] (國俗에서는) 祥祭에 再忌를 맞아 부득이 의복은 바꾸어 입더라도 오직 食肉의 一節은 달을 넘기는 것으로써 禮節을 삼고 있습니다(주자도 달을 넘기는 것이 옳다고 하였음). 그런데 퇴계가 "주자는 王肅의 說에 대해 禮의 本意를 얻었다고 하였으므로 가례에서 大祥 후에는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다." 라 하였으니 퇴계의 說은 朱子의 달을 넘기는 것이 옳다는 뜻에 어긋난 것 같습니다.

[답](前略) 이제 國俗이 이같이 행한 것이 이미 오래 되었으며, 또한 厚한 것을 따르는 것이 禮道이니 이제 마땅히 國俗을 좇을 것이다. 다만 司馬公의 말에 이르기를 나이가 50세 이상으로 血氣가 이미 쇠한 자는 반드시 술과 고기로 돕게 하여 부양할 것이니 이와 같은 사람은 大祥後에 바로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어도 또한 禮에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

이 문답은 大祥 직후의 飮酒 食肉에 대하여 그것이 可하다는 古禮 및 王肅(195-256)과 이를 지지한 퇴계의 禮說에 대해 대상 한달 후에 음주 식육하는 것을 택하고 있는 國俗 및 {가례}의 입장 중 어느 것을 택해야 禮에서 합당한가의 질문이다. 이에 대해 김장생은 국속이 이미 오래되고 또 예에 厚하니 국속을 좇으라 하고, 그러나 노쇠한 자를 염려하여 사마공의 예설로 보충하는 합리성을 보이고 있다. 한마디로 조화적 수용자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사계예학파는 영남예가와의 에설교류를 통한 예제의 조화로운 정립을 추구하였다. 그것은 앞의 많은 예문답의 사례에서도 확인된 바와 같이 고례와 가례와 속례의 조화를 취하였음은 물론이고, 또한 조선의 제 예설을 집성하고 계보를 달리하는 영남예가와의 예설교류를 통하여 이를 보완하려는 노력을 첨가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특히 김장생에 의해 적극적으로 시도되었다. 그것은 퇴계의 {상제례문답변의} 등에서 확인되거니와 또한 鄭逑 鄭經世 申湜 등 영남의 대표적 예가들과의 예설교류를 통하여 더욱 보완되었다. 그리고 김장생과 김집의 문인이면서 또한 영남의 대표적 예가인 정경세의 사위인 송준길을 통하여 양 계열간의 예설교류가 보다 확대되었다. 이러한 예설교류는 사계예학파의 예학경향과 예인식의 영역을 한층 더 넓혀주는 계기를 제공하였고, 결국은 조화로운 조선예학의 수립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런데 國制와 俗禮가 다른 경우에 발생하는 문제들도 없지 않았다. 김장생은 문인 송준길이 "요즘 세상에 사대부의 집안들이 혹은 4대를 제사하고 혹은 3대를 제사하니 어떤 것이 옳은가" 에 대해 묻자, "3대를 제사하는 것은 時王의 法制이다. 그러나 高祖(4대)까지를 마땅히 제사해야 한다는 것은 다만 程子와 朱子의 明訓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동방의 선현인 退溪와 栗谷 같은 여러 선생도 모두 고조를 제사하였다."라 하였다. 여기에서 그가 國家의 法制를 부정하고 속례의 4대 봉사의 관행을 그대로 준수할 것을 지지하는 입장을 보인 것은 주목된다. 비록 법제와는 다르지만 그것이 예정신에 厚하고, 또 {家禮}에 실려 있고, 程朱와 退栗이 모두 존중 실천하는 禮制였다는 점에서 수용한 것이었다.

한편 속례의 조화적 수용의 면에 있어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학적 계보를 달리하는 영남예가들과의 예설교류를 통하여 조선의 제 예설을 집성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수용·보완하려는 경향이었다. 이러한 노력은 특히 김장생에 의해 적극적으로 시도되었다. 그것은 퇴계의 {상제례문답변의}에서 확인되거니와 또한 鄭逑 鄭經世 申湜 등 영남의 예가들과의 예설교류를 통하여 더욱 보완되었다. 그리고 김장생과 김집의 문인이면서 또한 영남의 대표적 예가인 정경세의 사위인 송준길을 통하여 양 계열간의 예설교류가 보다 확대되었다. 이러한 예설교류는 사계예학파의 예학경향과 예인식의 영역을 한층 더 넓혀주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사계예학파는 이러한 일련의 연구과정을 거치게 되면서 {가례}와 고례, 중국과 조선의 국제 및 국속례 등에 대해 깊은 관심과 해박한 지식을 두루 갖추게 되었으며, 그 결실로서 {家禮}를 크게 보완하고 조선적인 家禮를 이루었으니, 곧 朝鮮禮學의 수립이 가능케 된 것이었다.

셋째, 俗禮에 대한 自矜的 解釋과 적극적 수용을 보이는 예인식의 경우이다. 이것은 조선 예가들의 자주적인 문화인식과 관련하여 가장 주목되는 대목이다.

[문] 朱夫子가 李繼善의 물음에 답한 글을 보면 "어머니는 服이 있어도 혼인할 수 있을 것 같다"라 하였으니, 그렇다면 혼례는 輕하고 관례는 重한 것인지 몹시 의심스럽습니다. 어떤 사람이 "外祖喪은 비록 장례를 마치지 못했어도 主婚者가 服만 없으면 혼례를 행할 수 있다"라 하니 그렇다면 宗子가 主昏하고 服이 없으면 아버지가 아무리 重服이 있더라도 혼례를 행할 수 있다는 것인지요? 冠禮條도 참조해 보고 또 억측으로 말하면 外祖喪에 葬事가 지나지 않았는데도 昏禮를 행하는 것은 심히 미안할 것 같은데 禮意가 어떠한지요?

[답] 朱子가 李繼善에게 답한 말씀은 알 수가 없다. 더구나 輕重으로 말하면 혼례를 더욱 행할 수 없을 것이다. 外祖喪에 장사도 지내지 않고 혼례를 행함은 더욱 더 말할 수 없는 일이다. 先王의 제도에는 비록 小功에 기재되었지만 우리나라 情勢는 中國과 크게 다르고 또 禮는 人情에 맞게 만들어지는 것이니 어찌 가히 人情을 막고 古制에만 집착하여 本國의 常行之節을 무너뜨리겠는가?

이 문답은 外祖의 喪中에 손자가 婚姻을 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로서, 이에 대한 조선과 중국의 예속이 서로 다른 데서 오는 갈등의 문제였다. "중국에서는 외조의 상중에도 외손자가 혼인하고 있는데 우리도 이를 따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김집은 "우리나라는 情勢가 중국과 크게 다르고, 또 禮는 人情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니 어찌 古制에만 얽매여서 우리나라의 떳떳한 예행(常行之節)을 무너뜨리겠는가?" 라고 단호한 대답을 내리고 있다. 그가 중국의 어떤 예서나 예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예인식으로써 논한 이러한 자주적 예인식은 17세기 사계예학파의 예학적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며, 자기문화에 대한 드높은 자긍의식의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김집의 이러한 자긍적 예인식 속에는 중요한 예 정신이 종합적으로 함유되어 있었다. 즉 그것은 중국과 조선은 정세가 다를 수 밖에 없다는 地域性과 時宜性, 또 禮出於情을 강조한 예의 人情性, 그리고 禮의 기본 정신에 맞는 合禮性과 合理性 등이 모두 포괄된 것이었다. 김집의 이러한 자기문화에 대한 확고한 자긍적 예인식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가슴 뭉클한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예인식이 자기문화에 대한 강한 자주성과 자긍성을 지니면서도 결코 편협된 것이 아니라, 옛 성현들의 예의 기본정신에도 부합되는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계예학파의 예학적 전통과 그의 오랜 예학연구의 소산으로서 만이 가능한 것이었다.

또 송시열의 {예의문답}에는 그의 집안에 있었던 실제적 사례로서, 古禮를 존중하는 송준길의 예설과 人情을 붸아 厚한 俗禮를 따르려는 송시열의 입장이 대조적으로 잘 나타나고 있는 예설이 소개되고 있다. 그것은 最長房이 죽은 후 次長房이 그 神主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일을 언제부터 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한 문답이었다. 당시의 관행과 원래의 예법에는 3년상을 지낸 후의 吉祭 때에 신주를 모셔 오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송시열은 자신의 從兄이 모시던 조상의 神主를 3년간이나 제사지내지 못하다가 吉祭 때에 가서야 신주를 모셔오게 하는 일이 人情상 미안하여 송준길에게 고례적 자문을 들었으나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이때 송준길은 3년을 기다리라 했다). 그후 尼山의 尹門에서는 장례후에 바로 移安한다는 말을 듣고서 이것이 대가의 예법이고, 또 人情에 厚한 사례인 것으로 판단하여 이를 좇았다는 것이다. 이 기사는 또한 윤증의 {의례문답}에서도 발견된다.

이렇게 김집이나 송시열·윤증의 사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속례에 대한 예가들의 自矜的 解釋과 적극적 수용의 자세는 중국의 예제나 예설에 구애되기 보다는 時宜와 情禮에 바탕하여 자기적인 예문화를 세우려는 창의적인 문화정신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한편 이러한 사계예학파의 긍정적 자기문화인식은 이른바 조선후기의 眞景文化論과 관련지어 볼 때 다음의 두가지 측면에서 주목되는 바가 있다. 첫째는 진경문화를 선도적으로 만들어 간 인물들의 학문연원과 학맥구성이 사계예학파의 그것과 상당히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이다. 양 계파의 학문적 원류는 모두 栗谷 李珥에 두어지고 있으며, 이들은 또한 이후로도 줄곧 호서의 학맥에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으니, 그것은 진경문화를 이끌어 낸 두 문벌, 즉 光山 金氏家와 安東 金氏家와의 연관에서 찾아진다. 예컨대 한글소설로 저명한 金萬重은 사계예학파의 종장인 김장생의 증손이며, 독자적인 한문문학을 개척하고 이병연과 정선과 같은 대가를 길러낸 金昌翕은 또한 청음 김상헌의 증손이다. 그리고 김상헌은 사계예학파의 김집·송시열 등과는 함께 山黨으로서 北伐義理를 폈던 사상적 동지였다. 이것은 사계예학과 진경문화가 유사한 문화적 배경을 그 뿌리로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그 사상적 연원의 유사성을 짐작케 한다. 또 한가지는 이들 양자는 제한적이지만 자주적이고 자긍적인 자기문화인식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예컨대 글씨체에 있어서 兩宋體(진경시대에 유행했던 송시열 송준길의 글씨체)와 같이 외면상에 있어서의 문화적 동질성을 보이는 면도 있었지만, 내면에 있어서의 연관 즉 자기문화에 대한 자주성과 자긍의식이라는 측면이 공존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17세기 사계예학파의 자주적 자기문화 인식은 종래의 중화주의에서 朝鮮中華主義로 나아가는 인식변화의 일단일 수도 있고, 또한 오히려 그것을 선도하는 일면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3. 宗法論上의 差等的 禮認識과 普遍指向的 禮認識

宗法은 嫡長子相續을 핵심으로 하는 친족조직의 원리로서 주로 家系繼承과 祭祀相續 및 服制論 등의 기초원리로 기능하여 왔다. 그것은 또한 祠堂制度나 冠婚喪祭 등의 가례적 예의식을 통하여 尊祖敬宗의 崇祖思想과 종족적 결속을 강화하고 宗子에게 諸儀式의 主宰權과 일족을 통괄하는 도덕적인 지배권을 갖게 함으로써 유교의 정치적 이상이나 봉건적 국가질서 유지와 부합되는 측면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사회에서는 일찍부터 이러한 종법의 원리에 주목하고 효과적인 실천을 강조하였으며, 특히 윤리질서의 정립이 시대적 과제가 된 17세기에 있어서는 그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었다. 더구나 山林으로서 世道를 자임하고 또 학문적으로는 도통적 예학의 완성을 추구하고 있던 이 시기의 사계예학파에 있어서는 종법에 대한 존신이 더욱 컸으니 종법이 질서재건에 긴요한 논리이고, 또한 道統의 嫡傳인 朱子가 종법의 실현을 추구하였고 그의 {가례}가 종법원리에 바탕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종법은 기본적으로 義理名分에 바탕한 正統論의 원리이다. 따라서 그것은 모든 예제에서 統의 樹立을 중시한다. 그것은 명분있는 일관된 차등적 질서를 추구하며, 질서는 종국적으로 安定을 추구한다. 그것은 결국 예가 추구하는 이념과 별개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김장생도 일찍이 예의 기능을 '統緖를 바로 하는 것(正統)'이라고 갈파한 바 있다. 그가 인조대의 典禮論爭에서 굳이 종법적 정통론을 일관되게 주장한 것도 바로 이러한 예인식의 소산이라 할 것이다.

이렇게 종법에서는 統緖를 세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므로 이른바 不二統 不二宗 不二尊 無二斬 등의 철저한 차등적 원칙의 이행이 요구되는데, 그것은 특히 제사권의 문제 복제문제 입후권의 문제 등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사대부례에서 不二統이나 不二宗의 예인식은 宗子의 祭祀權의 문제에서 잘 드러난다. 제사권은 곧 가계 계승권과 직결되어 있는 문제이다. 김집은 {의례문해속}에서 嫡子가 아들이 있으나 廢疾이 있어 承祀할 수 없을 경우 次子에게 傳重하는 것이 禮法에 맞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宗法에 長子를 세우는 것은 不易의 禮이다' 라 하고, '長子가 비록 폐질이 있다해도 次子承祀는 불가하며 아들이 있으니 次子相續은 더욱 不可하다' 라 하였다. 폐질의 경우에도 次子承祀는 불가하고 嫡嫡相傳의 종법적 원칙이 고수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 不二尊 無二斬 등의 예인식은 복제 문제에서 잘 드러난다. 종법에 의하면 자식이 부모를 위하여 입는 복은 각각 참최3년, 제최3년으로 차등적이며, 그나마 父在母死時에 母를 위하여 입는 복은 제최3년이 아닌 齊衰期年服으로 한 등급이 더 강등된다. 家無二尊의 원칙에 준하기 때문이다. 곧 不二尊의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가례}에서는 父在母死時에도 母를 위하여 제최3년복이어서 종법적 기본 원칙에 위배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주자가 時俗에 구애되어 바꾸지 못한 예제였을 것이다. 그러나 김장생과 그 문인들은 이러한 종법의 원칙을 철저히 고수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것은 사계예학파의 예가들이 주자 보다 더 철저히 종법제도를 실천하려 하였음을 보여주는 한가지 단서가 된다.

不二宗의 예인식은 立後의 문제에서도 드러난다. 적자가 無子하여 입후하였는데 입후한 후에 親生子가 출생하게 되면 입후자의 위상을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에 대해서 당시의 國制는 嘉靖 癸丑 受敎에 의하여 친생자를 後嗣로 삼고 이미 입후한 繼後子는 衆子로 삼고 자의적으로 罷養하지는 못하게 하였다. 김장생은 胡文定이 繼後子를 嫡嗣로 삼은 사례 등을 들어 후에 친생자가 있더라도 계후자를 후사로 삼는 것이 옳다고 보았다. 후일 그의 문인인 최명길은 동일한 경우를 당하여 역시 스승 사계의 이러한 종법론을 그대로 실천하였다. 이것은 불이종의 종법론을 보이는 것이면서 또한 血統論보다는 義理論을 주로 삼은 예인식이기도 한 것이다.

사계예학파의 예문답서들에 의하면 이상의 종법론의 원칙들은 그 문인들에 의하여 대체적으로 그대로 수용되고 있었다. 그것은 사실상 종법론에 대한 긍정적 예인식의 소산이며, 종법론에 바탕하여 差等的 예질서를 구축함으로써 윤리질서 재건의 틀을 정립하려는 의도가 담긴 것이었다.

그러나 사계예학파의 이러한 종법적 예론은 기본적으로 이렇게 차등적 예인식을 보이는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또한 종법적 예제의 통일적 적용이라는 측면에서나 고례적 종법론이 국제나 속례보다도 더 보편적 내용을 지니는 사안에 있어서는 오히려 보편주의를 추구하는 측면이 또한 없지 않았다. 이 점은 우리가 조선예학을 검토함에 있어서 새롭게 주목해 보아야 할 측면이다.

조선사회는 性理學的 思考가 지배해 온 사회였고, 성리학은 예학과 더불어 이론과 실천의 학으로서 상호 표리의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성리학의 이념은 存天理 滅人欲의 '至公無私'에 두어지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지공무사적인 普遍의 원리는 그 실천학인 禮學에 어떤 형태로든 투영되어져야 할 성질의 것이었다. 특히 17세기 사계예학파의 예학은 철저히 {가례}중심적인 경향성을 띠고 있었으므로, 그것은 자연히 朱子와 그의 {家禮}가 지니고 있는 普遍指向的 論理에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성리학적 보편성의 원리가 그 실천학인 예학에서는 어떻게 표출될 수 있었는가? 그것은 대체적으로 禮制上의 無差別이나 혹은 그 차별성을 완화하자는 禮制나 禮說로 드러났다. 孝宗喪을 계기로 현종조에 시작된 일련의 禮訟에서 왕조례의 복제를 사대부례의 그것과 통일적으로 적용하자고 주장한 사계예학파의 天下同禮的 禮認識은 그 좋은 사례라 할 것이다. 그것은 비록 孝宗이 王統의 계승자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宗統으로는 엄연히 次子의 지위에 있으므로, 그를 위한 조대비의 복제는 사대부례와 마찬가지로 期年 이상이 될 수 없다는 논리였다. 그것은 물론 國制에 근거하고 나아가서 古禮의 예설에 바탕한 것이었지만, 기본적으로는 {가례}의 보편지향적 논리에 영향받고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계예학파의 보편지향적인 예인식은 그들의 예문답서들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우선 天下通喪의 禮로서의 3年喪制의 주장이나, 士庶人의 신분적 한계를 초월하여 4代奉祀를 일반화하자는 禮說 등에서 이러한 예인식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三年喪制는 원래 天下通喪으로 사대부와 일반민 모두에게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었으나, 실제의 운용에 있어서는 그 경제성의 문제와 避役의 수단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다는 현실적인 우려로 인해 일반적으로 용납되지는 못하였다. 그리하여 {經國大典}에는 서민 중 軍士에게만 용납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國恤에서의 3년상제의 시행과 관련하여 송시열은 '3년상은 天下通喪의 禮'라는 孔子의 禮說을 제시하고, 부모의 상에서는 貴賤의 차별이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임금도 喪服을 입어야 마땅함을 강조하였다. 3년상제야 말로 君王과 士庶人이 한결같이 따라야 할 보편적인 규례로 인식한 것이었다.

또 '4대제사'의 문제에 있어서는 원래 {儀禮}·{禮記} 등의 고례나 {國朝五禮儀} 등에서 모두 신분에 따른 차등적인 제사의 원칙을 세워놓고 있었다. 즉 大夫는 3대 제사, 士는 2대 또는 1대 제사를 하도록 한 것이 그것이다. 그후 신분에 관계없이 4대봉사를 인정하는 禮制가 처음으로 만들어진 것은 {家禮}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는 이 문제가 행례에 있어서 상당한 논란 거리가 되었는데 사계예학파는 보편적 성향이 강한 {가례}의 원칙을 지지하고 실천하였다. 이는 김장생이 "오늘날 4代祖를 제사하는 것은 비록 古禮도 아니고 國法도 아니지만, 우리 집에서도 역시 程朱의 說을 따라 4대제사를 드리고 있다." 라 한 것이나, 송시열이 "三代를 제사하는 것은 國制요, 四代를 제사하는 것은 {家禮}에서 주장한 것이다. 우리 일가 중에 서울에 있는 사람은 {가례}를 따르고 시골에 있는 사람은 國制를 따르니 수 십년 전에 同春(宋浚吉)이 立議할 때에 모두 {가례}를 따랐다. 라고 한 데에서 확인된다. 또한 윤증 역시 그의 {의례문답}에서 꼭같이 4대제사를 지지하였다.

한편, 이 시기 사계예학파의 보편지향적 예인식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庶孼의 宗法的 地位와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관한 예설들이다. 물론 그것은 봉건적 신분제 사회라는 근본적인 한계에 제약되기는 하지만, 이전의 예제나 예설들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더 보편을 지향하는 성향을 분명하게 보이고 있다.

김장생이 벼슬이 없는 서인(서얼 포함)도 양반들과 마찬가지로 신주에 學生(남)과 孺人(여)을 쓸 수 있다고 한 것이나, 서얼의 부인도 소사가 아닌 씨를 칭할 수 있도록 한 것, 그리고 서얼도 최장방이 될 수 있다고 한 것 등의 예설을 편 것은 그가 하층민의 예속에 깊이 유의하고 있었음을 보이는 것이며 그 기본정신이 예속의 차별을 줄이고 예속상통을 지향하는 보편지향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보편지향적 예설 중에서 가장 논란이 컸던 문제는 次子奉祀(또는 從子奉祀)와 妾子奉祀의 대립이었다. 양자간의 대립은 법제적 규정에 선택적 조항이 들어 있어서 그 논란의 여지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또 서얼이 지니는 신분제적 한계로 인해 서얼이 타격을 입게 되기가 쉬운 문제였다. 김집은 문인 최석유가 "長子의 庶子에게 宗祀를 받들게 할 수가 없어서 次嫡에게 넘기려 하는데 이것이 禮法에 맞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古禮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지금 우리나라의 法이 그러하다"라 하였다. 또 '親盡한 조상의 神主를 옮김에 있어서 最長房의 순서를 정할 때에 庶曾孫과 嫡玄孫 중 누구를 우선적으로 택할 것인가' 에 대한 물음에 대해, 그는 적서의 신분적 차별에 바탕을 두기보다는 오히려 그 현실적인 경제적 실상을 고려하여서 결정하도록 하였다. 古宗法의 예원칙을 천명하여 현실적인 서얼차대의 모순을 지적하고, 최장방의 선정에서 서얼의 위상을 긍정적으로 인정하려는 그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하겠다. 이는 또한 명분과 실제와의 조화를 추구하고 있는 예설이기도 한 것이다.

김집은 그 자신의 처지가 이러한 갈등에 바로 직면하기도 하였다. 즉 그에게 嫡子가 없어서 자신의 妾子와 從子(同母弟 金槃의 子) 중 누구에게 宗祀를 전승케 할 것인가의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그는 宗祀를 從子에게 계승케 하고, 그 대신 자기의 제사는 자신의 妾子가 계승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김집의 종법 실천의 사례는 적자가 없으면 입후를 하여 가통을 계승하는 것이 관례였던 당시로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결단으로서 주목된다. 그것은 서얼의 종법적 위상을 제고하는 사례일 수 있고, 또한 적서의 차별을 우선으로 하는 당시의 종법관행에 비하여 보다 보편적인 종법실천의 실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계예학파의 보편지향적 분위기 속에서 송시열은 서얼의 종법적 지위에 대하여 보다 적극적인 긍정론을 제시하여 주목된다. 그는 嫡長에게 적자가 없을 때 庶孼差待를 전제로 한 次子奉祀權의 設定에 대하여 확실한 반대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원래 종법의 기본 원리가 嫡子인가 庶子인가의 신분제적 원리에 바탕하는 것이 아니고, 종법상의 宗子인가 支子인가에 바탕하는 것이라는 확신에서 이를 실천하려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송시열의 예인식은 {禮疑問答}에서의 그의 다음의 예설들에서 확연히 나타나고 있다.

[A] 大典 立後條에 이르기를 '嫡室과 妾室에 모두 아들이 없는 뒤에야 비로소 立後를 허락한다' 라 하였으니 이것을 근거로 하면 妾子가 奉祀할 수 있다는 뜻을 분명히 볼 수 있으니, 古禮가 또한 그러하였다. 그러므로 문익공(정광필- 필자)의 봉사를 鄭希蕃에게 맡겼던 것이니 희번은 鄭相 집의 ?屬으로 저 元老의 할아버지이다.

[B] 愼老(김집- 필자)께서는 생각 하시기를 '막중한 宗祀를 賤生(妾子- 필자)에게 맡길 수 없다' 하시어 金南原 子章(金益烈의 字, 남원부사를 역임하였음- 필자)에게 넘겨 君平에게 전하도록 한 것이다. 이것 또한 禮法家의 행한 것으로 당연히 士大夫家의 본받을 바가 될 만하다.

[C] 우리 집의 처지가 또한 愼老宅의 처지와 같다. 伯父께서 다만 妾子인 時燮만 두었는데, 백부가 돌아가신 뒤에 宗祀가 主簿 從兄(송시영-필자)에게로 돌아가니 이 종형은 第四房의 소생이시다. 그러나 鄭相家(영의정 정광필의 家 -필자)의 일이 끝내 정당함으로 내가 당초에 이로써 愼老에게 여쭈었으나 들어주지 않으셨다.

[A]는 영의정 정광필의 집안에서는 {경국대전} 입후조의 규정을 참작하여 孼屬에게 집안의 宗祀를 받들게 하였다는 것이고, [B]는 스승 김집이 실천한 사례를 예로 든 것이며, [C]는 송시열의 자신의 집안에서도 역시 차자와 얼속이 봉사권 문제를 놓고 논란이 있었음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 그의 집안에서는 결국 김집의 실천 사례를 좇아 從子繼承을 인정하는 移宗으로 귀결되고 말았지만, 처음의 논의과정에서 그는 김집에게 '次嫡으로의 移宗 보다는 伯父 자신의 서얼에게 승계하는 것이 좋겠다'는 입장을 피력하였고, 특히 '정광필가의 서얼 상속을 끝내 정당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라 함으로써 김집과는 상당히 다른 예설적 입장을 보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문제에서 김집은 古禮와 時王之制와의 조화로운 실천 방안을 강구하고 있었던 것에 대해, 송시열은 古禮적인 종법원칙의 준수를 보다 철저하게 주장하는 입장이었음을 알게 한다. 이러한 송시열의 보다 적극적인 보편지향적 사고는 사계예학파의 보편지향성이 한걸음 더 전향적으로 발전되고 있음을 보이는 것이라고 해석된다.

한편 여성의 사회적 지위나 종법적 지위에 대해서도 송시열은 상당한 보편지향적인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송시열은 과부의 守節에 대하여 "중국사람들은 모두 이것을 아름답게 여기고 있지만, 聖人의 일로 말하자면 德으로써 인도하고 禮로써 가지런히 하여 저절로 改嫁하지 않게 하는 것이 王道입니다. 法制 때문에 마지 못하여 개가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어찌 순수한 王道라 하겠습니까?"라 하여 自意에 의한 守節이 아니라면 그것은 잘못된 제도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것은 당시로서는 확실히 매우 돋보이는 진보적이고 보편지향적 사고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는 女性奉祀權의 연장으로서의 外孫奉祀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외손봉사의 논의에 대해 그가 "外孫奉祀는 朱夫子가 非族이라하여 배척하였으니 또한 감히 어기지 못할 바가 있는 것이다" 한 것은 그러한 그의 입장을 확실하게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과부의 재가를 허용하자는 입장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것인데, 이는 아마도 외손봉사의 문제가 宗法上의 原理에 관한 문제이고, 종법은 기본적으로 男系의 嫡嫡相傳을 기본원리로 한다는 사실에 구애된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외손봉사에 대한 반대의 예설은 또한 김장생의 예설에서도 보이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체적으로 사계예학파의 예설은 주자학적 보편지향성을 추구하는 것이며, 그것은 김장생 -김집-송시열의 단계로 내려오면서 점차 더 강화되어지는 경향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보편지향적 예인식은 당시의 禮學과 性理學과의 내면적 관련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고,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시대가 희구해 나가야 할 普遍指向的 時代精神의 논리적 근거와 현실적 구현의 한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4. 務實的 禮認識과 禮生活化의 추구

사계예학파의 예학사상으로 그 특징을 보이는 것의 하나는 務實사상이다. 禮는 본래 '義之實'이라 하여 義理(옳은 이치)의 구현이니, 본래의 의리를 드러내는 것을 저버리고 다만 형식으로 흘러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예가 행용화되는 과정에서 자칫 범하기 쉬운 것이 虛飾과 虛禮인 점을 감안하면, 이 무실의 정신이야 말로 禮의 本意를 잘 살려 나가게 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정신이라 할 수 있다.

김장생은 "옛날(중국)의 베(布)는 그 넓이가 2尺 2寸인데 지금 우리나라의 그것은 이보다 좁으니, 폭을 이어서 써도 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우리나라의 베(布)는 그 폭이 좁아서 1척 5-6촌 또는 1척 2-3촌에 불과하다. 따라서 폭을 이어 쓰지 않으면 그 사람이 몸이 비대한즉 찢어져서 입힐 수도 없고 소매도 짧아서 모양을 이루지 못하니 連幅하여 쓴 후에야 옷이 몸을 용납하고 소매는 가히 손을 덮어서 縱橫正方의 制에 합할 것이다. 혹자가 말하기를 연폭은 古制가 아니기 때문에 가히 쓸 수 없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전후가 꽉 막힌 생각이다." 라 하였다. 아무리 古制라 해도 그 조문에만 얽매이지 말고 合理性과 實用性을 고려해서 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제사음식을 {國朝五禮儀}에 수록된 士庶人의 祭饌圖와 같이 하게 되면 너무 간략한 것 같은데, 故人이 살아있을 때 먹던 음식으로써 제사하면 어떤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현재의 가정 형편을 헤아려서 행할 것이니 어찌 國制에만 얽매이겠는가?"라 하여 예문보다도 현실적 상황과 형편을 더 고려하는 現實性을 보이기도 하였다.

또한 김집은 이러한 務實思想에 매우 철저한 儒者였다. 문인 윤선거는 그가 쓴 김집의 [遺事]에서 "일찍이 {儀禮}의 鄕飮酒禮를 거행하고자 하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서 선생이 말하기를, '교육이 해이해지고 풍속이 각박해져서 이미 근본이 없어졌으니 徒行虛文이 아무 소용이 없다' 라 했다. 겉으로 꾸미고 안으로 實質이 없는 것은 진실로 선생이 가장 싫어하는 바였다" 라고 회고하였다. 실지로 김집은 實이 없는 형식적인 禮制는 철저히 배제하였다. 효종 즉위년 7월에 조정에서는 '返哭後 安神祭'의 거행 여부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는데, 이 때 그는 "古禮와 五禮의 禮는 모두 이에 관한 글이 없습니다. 그러나 虞祭에 이미 安心之義가 담겨있는 터라 初虞後에 朝夕奠을 폐하는 것인데, 다시 이름도 없는 奠을 올린다는 것은 마땅하지가 않습니다. 하물며 返哭之義는 그 뜻이 단지 生者가 산에서 돌아와 집에 와보니 亡者가 없는 고로 이를 슬퍼하여 哭하는 것일 뿐이지 神道를 安心시키는 뜻이 이에 있는 것이 아니니 安心祭는 마땅하지 않습니다" 라 하여 이를 정론화 시켰다. 그의 무실적인 예사상에는 이렇게 합리적 사고가 전제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송시열 역시 형식보다는 실을 추구하는 예정신이 강하였다.

그는 "{의례문해}에 程子冠으로 복건을 대신하라는 말이 있으나, 深衣가 없으면 무슨 옷으로 代用해야 할지를 말하지 않고 있는데 어떤가" 라는 질문에 대해, "老先生의 정자관에 대한 말씀은 부득이 한 데서 나온 것이다. 대개 복건이 없어서 禮를 廢하기 보다는 이것을 사용하여 禮를 이루는 것이 더 낫다는 뜻이다. 대개 先賢들이 탄식하는 것은 小不備에 구애받아 大不備에 돌아가는 것이다" 라 하였다.

윤증의 예문답 중에도 무실적 예사상을 보이는 예설이 적지 않다. 윤증은 그의 {상례유서}에서

묘표(墓表)는 가장 긴요하고 절실한 것인데 사람들의 집에서는 다분히 그것을 소홀히 하고 자손이 몇 세대가 지난 후에 그 위치를 알지 못하니 불가불 반드시 3년내에 세우게 된다. 묘표에는 음기는 필요하지 않고 다만 성명만 새기면 되는 것이다. 고총들을 둘러보면 비록 짧은 표석이 풀밭에 묻혀있어도 오히려 누구의 묘인지를 알 수가 있다. 비갈(碑碣)은 필요하지 않고 표석은 마땅히 반드시 3년이내에 세워야 한다.

라 하였다. 묘갈이 없이 다만 묘표만을 세우고, 또한 묘표에는 음기를 쓰지말라는 유언은 그의 평생의 무실적 사고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유언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작고하였을 때 그의 유서에 따라서 그의 묘비는 간단하게 작성되었다. 그의 무실적 사고가 그 자신의 상례에 나타난 또 하나의 징표라 할 것이다. 그의 무실적 예인식은 또한 종법적 예제에 얽매이기 보다는 정례에 바탕한 속례와 현실성을 충분히 고려하는 예인식을 표명한 데에서도 나타난다.

[문] 조주(?主 : 제사할 代가 다하여 옮겨야 할 신주)를 장방(長房 : 4대 안의 자손 가운데 항렬이 높고 나이가 위인 사람)에 모셨다가 장방 자신이 죽으면 차방(次房)에 옮겨 모셔야 하는데 이 일을 마땅히 어느 때 하여야 하는지요? 선생님의 집에서는 장례이후에 그것을 행하신다고 하는데 그것은 예(禮)에 근거가 있는 것인지요?

[답] 조주를 장방에 모신 일은 전일 우리집에서 행한 바이나 선유(先儒)의 예설에 근거한 바는 아니다. 그 때에 석호(石湖 : 윤문거) 숙부가 '제사를 옮겨 받드는 차례를 당하여 스스로 종가로부터 길제(吉祭 : 죽은지 27개월 만에 지내는 제사)때에 조출(?出)한다는 의와 더불어 같지는 않으나, 지금 3년동안 제사를 폐하는 것이 역시 미안한 일인 듯 하니, 상가의 3년 후를 반드시 기다릴 필요는 없다' 라 하고, 드디어 상가에서 여러 어른들이 의논하여 부제(부祭 : 아버지 보다 먼저 죽은 아들의 신주를 할아버지의 신주 곁에 모시는 제사)를 마친 후에 신주를 받들어 왔고, 그 후에 이것을 문중의 규례로 삼았다.

이것은 遞遷하는 神主에 대한 祭祀 移轉의 시기에 관한 문제이다. 그것은 이미 古禮의 정해진 제도가 있는 것이지만 옛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예의 合理性과 人情에 바탕하여 보다 인정에 후한 俗禮의 전통을 만들어 시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례는 이미 송시열의 {예의문답}의 예문답 속에서도 그 모범적인 사례로서 긍정적으로 수용되었던 일이다.

이렇게 김장생과 김집, 그리고 송시열과 윤증의 예문답 사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들은 禮의 行用에서 합리성과 實質과 實用을 중시하는 입장이 분명하였다.

그리고 속례에 대한 이 시기 예가들의 자긍적 해석과 적극적 수용의 자세는 중국의 예제나 예설에 구애되기 보다는 예출어정(禮出於情)이라는 예의 기본정신을 존중하고 시의성과 지역성에 바탕하여 자기적인 예문화를 창제하려는 창의적인 문화정신을 보이는 것이었다.

禮의 實用性의 추구는 예의 合理性을 전제로 하며 그것은 결국 禮의 生活化를 목표로 하게 된다. 이것은 禮制가 형식논리에 제약되어 그 실용성과 합리성을 잃으면 안되며, 이러한 실용성과 합리성을 갖춘 예제의 실천은 통상적인 冠婚喪祭의 기본적 儀禮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전체에서 실천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지닌다. 이것은 곧 실질을 추구하고 실천을 강조하는 적극적인 예인식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예의 본의에 벗어나고 실질이 없는 형식적인 禮制는 기본적으로 배격되었고, 예정신을 벗어나지 않은 것이라면 복잡한 의례절차를 간소화하는 禮說이 수용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점차 관혼상제의 통상의 四禮 儀式에서 뿐만 아니라, 예컨대 서얼의 부인을 召史라고 칭할 것인가 氏로 칭할 것인가, 服中에 風樂을 들을 수 있는 범위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 神主에 題를 쓴 사람에게 사례를 하여야 할 것인가 말것인가의 문제 등 일상적인 사소한 문제에 이르도록 철저한 합례적 예인식을 요구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당시가 예에 대해서 얼마나 철저한 시대였는지를 새삼 절감케 된다. 예실천의 면에서도 이 때는 가히 禮學의 時代라 할만한 시기였던 것이다. 예제의 실용화와 예의 생활화를 추구한 이들의 예인식은 또한 사계예학파의 主氣的 學風과 山林의 禮治主義 意識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였다.

Ⅳ. 맺음말

이상으로 예문답서에 나타난 17세기 사계예학파의 예학경향과 예학사상을 개관하고 그것이 지니는 역사적 의의를 시론적으로 검토해 보았다. 이 시기 사계예학파의 예학경향과 예학사상은 {家禮}와 古禮에 대한 尊信이 투철하였던 道統 繼承的 禮認識, 예제의 合理性·實用性의 추구와 俗禮의 조화적 受容, 宗法論上의 差等的 禮認識과 普遍指向的 禮認識, 그리고 務實的 禮認識과 禮 生活化의 추구 등으로 요약되었다.

결국 17세기 사계예학파의 예학은 윤리질서의 재건이라는 시대적 과제에 대해 道統的인 禮學의 再整備를 통하여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보수적 경향성을 지니고 있었으나, 그것은 동시에 새로운 예학적 성과와 문화인식의 변화를 수반하고 있었으며, 실용과 보편을 지향하는 당시의 時代意識의 一端을 반영하고 또 이를 先導해 가는 측면을 지니고 있었다고 이해된다.

사계예학파가 이룩해 낸 {가례}의 완성과 조선예학의 수립은 곧 우리가 道統의 主體라는 학문적 자부심을 갖을 수 있을 만한 것이었고, 18세기 朝鮮中華主義思想 성립의 한 토대가 될만한 것이었다. 또한 예제의 실용성의 강조와 예의 생활화의 추구는 사계예학파의 主氣的 학문경향과 山林으로서의 그들의 禮治主義的 禮認識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특히 時宜와 情禮에 바탕하여 國制와 俗禮를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수용한 自主的 禮認識은 17세기말 이래 전개되어진 조선의 새로운 문화의식(眞景文化 意識)과 일맥 상통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들의 普遍指向的 禮認識은 당시의 예학과 성리학과의 내면적 관련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고, 보편지향적 시대정신의 논리적 근거와 현실적 구현의 한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沙溪사상이 후대에 미친 영향

김 문 준(건양대)


<목 차>




Ⅰ. 머리말

Ⅱ. 金長生의 學問精神과 그 영향

Ⅲ. 金長生의 禮學思想과 그 영향

Ⅳ. 金長生의 社會政治思想과 그 영향

Ⅴ. 現代 韓國社會에 미친 영향



Ⅰ. 머리말

沙溪 金長生(1548∼1631)은 17세기 한국의 도학자 가운데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국가정신과 사회발전의 방향을 제시한 장본인이다. 김장생은 한국 도학의 전통을 계승하여 '聖學의 宗旨'를 참답게 알고 그 학문과 정신을 전 생애를 통하여 실천하였으며, 기울어져 가는 조선사회와 문화의 방향을 仁義의 인간, 人倫과 禮義의 사회로 재건하고자 노력한 도학자였다.

김장생은 龜峰 宋翼弼(1534∼1599)의 학문을 계승하고 栗谷 李珥(1536-1584) 학문의 嫡統을 이어받아 예학을 정비한 한국 예학의 종장이며, 靜庵의 德治·退溪의 道學·栗谷의 學問·尤庵의 義理와 더불어 조선의 五賢으로 추대되었으며 한국 제일의 예학으로서 인식되어 왔다. 또한 栗谷 李珥의 嫡傳으로서 愼獨齋 金集(1574∼1656), 同春堂 宋浚吉(1606∼1672), 尤庵 宋時烈(1607∼1689), 草廬 李惟泰(1607∼1684), 市南 兪棨(1607∼1664) 등 조선 후기 도학과 예학을 대표하는 인물들에게 학문과 도학정신을 전수하였다.

김장생이 살았던 16세기 중엽에서 17세기 중엽에 이르는 시기는 국내외로 다난했던 시기였으며, 이에 따라 조선 후기의 사회양상은 큰 변화를 수반하게 되었다. 수 차례에 걸친 혹독한 士禍(1498∼1545)가 지나자 동서·남북의 분당, 仁祖反正(1623)과 李适의 亂(1624)이 벌어졌으며, 임진왜란(1592∼1597)과 정묘호란(1627) 등의 대규모의 외침을 겪었다. 김장생은 양란 이후 급변하는 사회의 안정을 기하고, 쇄락한 선비의 기풍을 불러일으키고자 당시 조선의 학문계와 정치계에 걸쳐 활약하면서 禮學에 입각하여 국가 재건과 질서안정을 추구한 전형적인 조선 선비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김장생의 학문정신과 사상, 특히 예학사상의 내용과 특성을 정리하고, 그것이 조선후기 사상사의 발전과 사회변화에 미친 영향, 그리고 현대 한국사회의 가치관에 미친 영향을 고찰하고자 한다

Ⅱ. 金長生의 學問精神과 그 영향

김장생의 학문과 그 정신은 '眞知'의 탐구요 그 실천이라고 요약할 수 있으며, 이러한 김장생의 眞知실천정신은 한국도학정신의 정통적인 계승이었고 조선후기 기호학파의 도학으로 이어지는 데에 다음과 같은 큰 역할을 담당했다.

첫째, 김장생의 학문과 그 정신의 영향은 한국 도학의 眞知실천을 계승하고 후세에 전수하였다는 데에 第一義가 있다.

김장생은 한국 도학의 계통으로 圃隱 鄭夢周, 寒暄堂 金宏弼, 靜庵 趙光祖, 退溪 李滉을 들고 특히, 栗谷 李珥를 높였다. 김장생은 그 이유로 그들이 眞知를 실천하여 聖人됨으로 宗旨를 삼아, 언행이 일치하며 事業을 함에 時宜에 합당하고, 出處에 있어서 正道로 하며, 進退에 있어서 義理로 하고, 과거를 잇고 미래를 펼치는 큰 책임을 감당하여 도학의 맥을 무궁하게 이으려고 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김장생 또한 한국의 도맥을 이어 자신의 일생을 통하여 진지를 추구하고 실천하며 후세에 전수하는 일을 자기 본무로 삼았으며, 이러한 김장생의 진지실천정신은 조선 후기 기호사림의 師表가 되었다.

둘째, 김장생의 성리학과 예학은 眞知를 알고 실천해 가는 과정이었으며, 이러한 학문정신은 문인들에게 전수되었다.

조선시대의 학문과 사상은 성리학과 예학으로 대변되는데, 성리학과 예학은 맥을 같이 한다. 성리학은 도와 덕을 행하는 이유를 연구하는 학문이며, 예학은 도와 덕을 실천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禮는 바로 理를 구현하는 구체적인 사실이다. 김장생은 학문이란 학문을 넓혀 가는 일과 아울러 자기 자신이 涵養하고 踐履에 힘쓰는 '博文約禮'의 정신을 지녀야 한다고 여겼다. 이와 같이 김장생이 추구한 지식이란 자신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김장생은 인간이 인간됨을 다하기 위해서는 고유한 자기의 인간 본성을 잃어버리지 않는데 있다고 했으며, 지속적으로 예를 행하는 삶을 통하여 자기 본성을 발휘하여 인생을 고양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김장생은 道學에 뜻을 둔 사람은 性理學에 전심하여야 하고 성리학을 공부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讀書와 窮理를 우선하여야 한다고 했다.

김장생이 일생을 통하여 연구한 {近思錄釋疑}와 {經書辨疑}는 眞知에 관한 탐구 과정이었고, {家禮輯覽}은 眞知를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 行動규범을 정립하려는 노력이었다.

또한 지속적인 예 실천을 통하여 인간의 선한 본성을 더욱 계발하고 그렇게 하여 전체 사회구성원이 모두 자기 본성의 선함을 타인에게 베푸는 인간사회를 달성하고자 했다. 즉 개개인이 사회의 운영원리인 예를 행하는 그 자체가 중요한 사회적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예행을 통하여 자기 본연의 선한 본성을 깨닫고 자기 욕구를 절제하여 타인의 욕구를 배려하는 정신을 갖게 하는 도덕적 의미로서도 중요한 의의가 있다.

셋째, 김장생이 제시한 경전공부는 {소학}, {가례}, {심경}, {근사록} 등 진지의 실천을 기하기 위한 것이었고 이러한 학문 내용과 순서는 김장생의 高弟인 송시열에게 전수되었다.

김장생은 예를 시행하는 데 있어서 인순고식적인 준행이 아니라 의식적이며 체계적으로 眞知를 실천하도록 하고자 하였다. 그가 세운 학문체계는 그러한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朱子는 학문하는 순서를, {소학}→ {近思錄}→ {대학}→ {논어}→ {맹자}→ {중용}→ '五經'→ '史子'로 한 데 비해, 김장생은 {소학}→ {가례}→ {心經}→ {근사록}→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오경'의 순서로 하여, {소학}과 {근사록} 사이에 {가례}와 {심경}을 첨가하였다.

이것은 주자가 '수기(修己)'하는 근본인 {소학}을 배운 뒤 의리와 도리를 자득하는 과정으로 나아가도록 한 데에 비해, 김장생은 '수기'의 {소학} 다음에 '제가(齊家)'의 {가례}를 거쳐 이를 토대로 의리와 도리를 체득하는 단계를 제시한 것이다. 주자가 형이상학적인 진리를 인식한 후 그 실천을 중시한 데 비해, 김장생은 예학자로서 형이상학적 지식보다 인간의 기본윤리를 중시하고 실천을 통한 진리 인식을 중요하게 여겼다.

예제 실천을 통해 궁극적 진리를 체득해 가는 과정을 중요시한 김장생의 영향으로 인하여, 송시열은 "金宏弼은 {小學}, 趙光祖는 {近思錄}, 李滉은 {心經}, 李珥는 {四書}를 중시하였다면, 김장생은 {小學}과 {가례}를 중시하였는데 자신도 김장생 선생을 따른다"고 하였다. {小學}과 {家禮}를 존숭하는 畿湖禮學의 학문내용과 방법이 전수된 것이다.

넷째, 김장생의 예학은 인간의 善意志야 말로 사회의 正論과 秩序의 기반이라고 생각했으며 선의지를 기르기 위해 예를 통한 자기 수양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예실천의 기본정신은 문인들에게 전수되었다.

김장생의 예학은 '存天理 去人欲'을 목표로 하는 理氣 性情의 성리학을 바탕으로, 자기를 節制하여 본래의 마음을 회복하고 天理를 실현한다는 정신을 담고 있다. 성리학의 본원은 객관적 진리(天)와 주관적인 인간 심성(人)의 관계성과 그 실현방법을 문제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김장생은 이러한 성리학의 기본정신에 충실하여 우주의 太極이나 만물의 太極보다 인간 자아 속에 내재한 '人心의 太極'(人極)을 강조했다. 김장생은 이기 성정을 논하는 까닭은 天理를 밝히고 人心을 바로잡으려는 것이며, 그것은 결국 자아의 人極을 인식하고 실현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인극이란 인간의 자유의지 중에서도 善意志를 지적한 것으로, 性善의 본성에서 純情으로 순정에서 善意志로 도출되며, 이 善意志로부터 德行과 善行이 되고 이 善行은 正論과 秩序의 기반이 된다고 생각했다.

자기절제의 정신은 자기 욕심을 누르고 남에게 사양하는 善意志의 정신이다. 이는 克己라는 內省的 수양과정을 거쳐 사정과 사욕을 억제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극기를 통해 어질고 선한 자기 본성을 깨닫고, 이로써 스스로 자율적인 선의지를 지녀야 한다. 김장생은 예는 천리에 근본하는 것이며 기강과 人道의 大端이라고 하였으며, 김집은 예라는 것은 人欲을 절제하고 천리를 보존하는 법칙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언명들은 당시 사림이 생각하고 있는 예의 철학적 기반을 잘 나타낸다. 김장생은 예의 실천은 자기를 극복하는 수련 과정이라고 보았으며, 김장생 자신은 물론 그 문인들도 예행에 힘써 소홀함이 없었고 다른 이들의 모범이 되었다. 특히 송준길은 김장생의 가르침으로 '禮' 한 자를 종신토록 받들어 그것을 힘써 체득하고 구현하는 일에 헌신하였다.

다섯째, 김장생의 예학정신은 병자호란 이후 王道를 높이고 覇道를 반대하는 춘추정신으로 계승되었다.

17세기 이후 김장생의 예학정신은 후대의 의리정신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성리학에서 禮는 義의 궁극적인 표현방식이므로 예학의 발전에는 그만큼 사회정의에 대한 추구열이 강하게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성리학을 통하여 人極을 세우고 진리를 내재화하여 人極을 행한다는 김장생의 眞知실천정신은 송준길과 송시열 등을 비롯한 문인들에게 불굴의 인도정신으로 이어져 비인도적인 힘을 숭상하는 覇道를 배격하고 仁義를 숭상하는 王道와 德治를 추구하는 춘추정신의 바탕이 되었다.

인격의 德과 사회적 직분에 따른 인륜적 책임을 다하려는 王道를 높이고, 힘의 大小 强弱만을 문제삼는 覇道를 천하게 여기어, 夷狄 집단을 물리치며, 王道의 길을 올바로 제시한 학문을 계승하고 覇道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는 일체의 학술을 배격한다는 '撥亂反正'의 춘추정신은 조선후기 한국정신사의 기본 바탕이었다.

여섯째, 특히 김장생의 眞知실천 정신은 直의 정신으로 요약되었고 直의 정신은 송시열에게 이어져 강력한 춘추의리정신으로 발양되었다.

直의 정신은 孔孟과 朱子에게 일관된 道統이며, 송익필·김장생·송시열에게 전수된 기호예학의 心法이었다. 공맹과 주자를 이어 直의 철학을 수립한 송익필의 사상은 김장생에게 전수되었고, 小學과 朱子家禮의 실천을 통하여 人極을 자각하고 행하려던 김장생은 直을 이어 받아 마음을 세우는 요체로 삼았으며, 沙溪의 直의 정신은 특히 송시열에게 전수되었다.

일곱째, 김장생의 산림정신은 후대 도학자들의 모범이 되었다.

선비가 科擧를 외면하고 자기수양과 교육을 본무로 삼는 전통은 4대 士禍와 격렬한 정쟁을 거치면서 사대부의 생활신조가 되었는데, 특히 김장생은 중앙정계에서 일생을 보내기보다는 향리에서 학행을 닦고 후세를 양성하는 일에 힘썼다. 김장생은 山林으로 우대받은 최초의 인물이었으며, 이러한 인품과 산림정신은 후세의 모범이 되었다.

김장생이 조선 예학의 일대 종사라는 평을 받는 이유는 예에 관한 지식이 해박하여 예학에 대한 업적이 지대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학문적 업적에 앞서 居敬遵禮로 일관된 學行이 일대의 모범이 되어, 그의 문하에서 당대의 예학자가 많이 배출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김장생은 관직에 나아가는 進退에 분명하여, 임금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면서도 의리에 맞지 않으면 벼슬에 나가지 않았으므로 일생동안 조정에 머문 날은 얼마되지 않았으나, 예학을 중심으로 학문에 정진하면서 제자를 많이 양성하였다. 춘추대의로 후세의 사표가 된 송시열이나, 김장생이 후세 禮家의 宗匠이 될 것이라고 평한 송준길 등 문인들은 사상과 처세의 면에서 김장생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그들이 죽음도 불사하고 公道와 大義를 지키는 정신, 時俗과 타협하지 않는 기개와 청렴결백한 인품은 스승 김장생로부터 받은 유산이었다. 특히 예를 통한 덕성함양을 강조한 김장생의 가르침으로 춘추대의정신과 독자적인 예설을 확립할 기초를 마련해 주었다.

Ⅲ. 金長生의 禮學思想과 그 영향

조선후기 사상사에 있어서 김장생의 가장 큰 역할은 예 연구의 수준을 높여 하나의 학문영역으로 만들었다는 점에 있다. 김장생 이전의 예학이 각종 의례를 준수하기 위한 실용적 연구였다면 김장생의 예학은 사람들이 가례의 여러 의례를 행하는 이유를 알고 준행할 수 있도록 학문화한 것이다. 이러한 김장생의 예학은 조선 후기 학문계에 다음과 같이 큰 영향을 미쳤다.

첫째, 김장생의 예학 이후 사림들은 예학을 학문의 한 영역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김장생은 정밀한 고증을 통하여 예 시행을 뒷받침하는 본원을 정립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가 저술한 {家禮輯覽}과 {疑禮問解}는 조선의 예서 가운데 학문적 여건을 구비한 초기적인 위치에 있는 것이며, 예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방향을 제시한 업적으로 평가된다. 김장생이 가장 공을 들인 것은 {家禮輯覽}과 {疑禮問解}로서 그의 만년까지 보완하는데 정성을 다하였다.

김장생이 가례에 대하여 經書를 통한 고증으로 辨正한 학문적 기여는 한국 학술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김장생은 당시 한국의 실정에 맞게 {國朝五禮儀} 등 국가 典禮를 인용하고 이황·김인후·송익필·이이 등 선배 스승은 물론 후배나 동학의 禮說까지 모두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한국 예학의 기초를 수립하였다.

김장생이 理學·經學·考證을 모두 겸하여 예에 관한 연구를 학문의 위치로 올려놓은 후, 종래에는 예를 經의 일부로 여겨 학문 영역을 經·史로 구분하였으나 경으로부터 예를 분리하여 경?사?예가 각기 학문의 한 분야가 되었다. 김집은 부친을 이어 예학에 전념하여 {疑禮問解續}을 짓는 등 예학의 大家를 이루었으며, 송준길과 송시열과 이유태 등도 예학에 밝아, 당시 국가 사회의 전반에 걸쳐 각종 典禮문제나 疑禮문제에 관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그들의 문집 가운데에는 예설에 관한 질의 문답이 많다.

둘째, 김장생은 {가례}를 중심으로 하는 예 시행을 중시했는데, 이러한 {가례} 중심의 예 시행방침은 조선 후기 禮行의 기반이었다.

김장생이 한국의 예학사에 기여한 점은 朱子家禮의 학문적 기반을 수립한 것이다. 성리학과 경학을 통해 논거를 찾고 고금의 禮書를 통한 辨正을 통해 미비점을 보완하고, 각종 變禮문제에 대하여 스승 선배나 문인 동학들과 疑禮를 문답하고 정리하여 예를 보급하는데 기여하였다. 이러한 예학 태도는 한국 예학의 기반을 이룩하였고 조선후기 예학의 이정표가 되었다.

17세기의 예학은 크게 두 계열로 나뉘어 발전하였는데, 하나는 {가례}를 중시한 김장생과 그 문하의 예학이고, 하나는 古禮를 중시한 寒岡 鄭逑(1543∼1620)와 그 문하의 예학이다. 그러나 결국 사대부들이 행하던 예학은 가례였으며, 조선 후기를 지나면서 일반 서인들까지 四禮를 널리 행하였는데 이는 모두 가례를 행하는 것이었다.

셋째, 김장생은 성리학적 예제를 정립하였음은 물론 그 예행을 일반 백성의 삶 속에 실천하도록 보편화시켰다.

김장생의 예학은 趙光祖의 至治主義 정신을 계승하여 {小學}과 {家禮}를 일상생활의 儀則으로 정립 보편화하였고, 사대부들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사대부의 예제를 본받아 실행하게 되었다. 김장생은 四禮 가운데에서도 가장 어려운 喪禮와 祭禮의 變禮 문제에 대하여 時宜에 맞도록 禮를 정립하여 禮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김장생은 情文이 일치되고 현실에 부합되도록 예의 합리성을 기하였고 문헌을 통한 고증과 실증으로 현실의 각종 생활 예를 정리하여 예제를 수립하려고 노력하였다. {疑禮問解}는 문인들이 冠·婚·喪·祭의 예의 중에서 의심되는 문제를 질문한데 대하여 김장생이 해답한 내용인데, 특히 禮經이나 朱子家禮에 기록이 없는 變禮에 대한 문답이 많다. 김장생은 김집, 송준길, 송시열, 이유태 등에게 더욱 연구하여 誤謬를 밝히고 補闕하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김장생이 얼마나 완벽한 생활례를 정립하려고 했는지를 알 수 있으며, 그러한 노력의 소산인 {疑禮問解}, {喪禮備要}, {家禮輯覽} 등 김장생의 禮書 3부작은 조선후기 생활예의 준칙이 되었다.

넷째, 김장생은 고식적인 古禮의 준행이 아니라 時俗에 맞는 예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이러한 합리적 예정신은 후세 예학의 기반이었다.

김장생은 禮制가 불변해야 한다고 여기지 않았다. 사회의 양상이 변화함에 따라 현실의 실상과 이상의 명분이 어긋나게 되므로 변혁해야 한다고 여겼다. 김장생은 {가례}에 입각하여 冠婚喪祭를 준행할 것을 주장했는데, 가례 준행은 가례에 기록되어 있는 예제의 儀章度數를 맹목적으로 실행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먼저 가례의 예제에 담긴 義理와 情文과 名分을 이해하고 준행해야 바른 실천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한 바탕위에 형식적 예행위를 비판했다.

김장생은 朱子의 家禮를 근본으로 하여 그의 禮說을 주장하였으며 古今의 禮書를 참고하여 옳고 그름을 가려내었으며 비록 朱子의 설명이라도 風俗과 人情에 어긋나면 과감하게 고쳐 공공한 바른 법칙이 실천의 주체인 인간에 있어서 올바르게 구현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이와 같이 김장생은 전대의 선유들보다 더욱 가례를 존신하고 준행하면서도,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家禮輯覽} 8권 {疑禮問解} 8권, {喪禮備要} 4권, {典禮問答} 2권 등 체계적이고 방대한 예서를 편찬했다. 그것들은 家禮를 기본으로 하여 중국과 한국 先儒들의 설을 고증하고 당시의 俗禮를 보완하여 당시의 실정에 맞는 예제를 제정한 합리적 노력의 소산이었으며, 이러한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예 실천정신은 조선후기 예 실천의 전범이 되었다.

Ⅳ. 金長生의 社會政治思想과 그 영향

1. 禮治思想의 영향

김장생의 정치사회사상은 名分사상과 人倫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도학정치의 강화였고, 그 구체적 실현을 위하여 禮治를 강조했다. 예치의 핵심은 宗法을 통한 統의 수립을 이루어 孝悌忠信의 사회적 기풍을 정립하려 한 것이다. 이러한 사회정치사상은 17세기 이후 그 문인들에 의하여 조선후기 사회정치의 방향이 되었다.

김장생은 仁祖反正 직후 광해군의 폭정과 이괄의 난으로 인해 피폐한 국정을 바로 잡고자 反正功臣인 李貴, 金?, 張維, 崔鳴吉 등에게 정국 운영의 기본 방향을 제시하고 당부했다. 그 내용은 君主의 마음을 바로 잡아 시책에 잘못이 없게 하고, 民生苦를 우선 해결하며, 刑獄을 공정하게 처리하여 오판이 없게 하며, 人才를 등용하여 소인을 물리치고 사람을 위해서 관직을 두지 말고, 뇌물로 庶政을 이루지 말며, 국가의 紀綱을 세워 부조리를 제거하며, 公私의 구별을 엄격히 하여 私意와 요행의 門을 막고 民心을 맑게 하여 利己心을 바로 잡을 것 등을 상세히 당부하였으니, 이러한 도학정신의 현실 구현은 조선후기 정책의 기본 방침이었다.

이와 같이 김장생의 정치사상은 '格君心', '先養民' 등 도학정치의 이상을 피력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후세에 미친 영향은 宗法을 기반으로 한 국가재건이며, 禮治를 통한 왕도실현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김장생은 禮의 문화생활을 토대로, 德化禮治, 仁義의 文治를 이루려 했다. 仁의 구현은 그 궁극 목적이요, 禮敎는 그 방법이다. 김장생은 예가 다스려지면 국가가 다스려지고 예가 문란해지면 국가가 혼란해진다고 하여, 예를 국가 治亂의 관건이라고 보았다. 仁義를 바탕으로 한 '修己愛人'을 人文禮敎의 덕치로써 구현하자는 것이다. 그의 治道는 '明天理' '行王道' '正人心'을 목표하여, 퇴락한 습속을 교정하고 기강을 진작시키고 백성의 고통을 혁파하는 것을 우선한 것이었다. 그러한 목적달성을 위한 방법은 근본적으로 禮治라고 여겼다. 禮와 政을 一元化시킨 것이다.

인간 본성은 仁義이며, 그 인간의 본성을 사회화하여 일상생활의 禮制를 제정하고, 예제를 근거로 인륜 정치를 시행한다는 예학정신은 禮敎를 통하여 인간의 본성을 잘 발휘하게 하고 부정과 부조리를 배격하여 三代의 이상세계를 이룬다는 적극적인 현실참여 정신을 담고 있다. 조선 후기 사상사와 정치사의 주역이었던 송준길 송시열 등이 인륜을 준거로 삼아 현실을 비판하고 대의를 지키는 일에 힘써 노력한 것은 김장생의 영향이다.

송준길과 송시열 등 김장생의 문인들은 인간세상의 부조리와 사회의 불안정이 일차적으로 윤리 도덕의 붕괴 때문이라고 인식하였으며, 그 해결 방안 역시 人倫질서의 회복에 있다고 여겼다. 人倫은 인간 인간상호간이 관계하는 원리(理)이며 그 속성은 仁이라고 여겼다. 理는 理一의 理도 있고 分殊의 理도 있다. 모든 사회 구성원이 통합하고 관계하는 원리(리일지리)는 仁이고, 인으로 대하는 것은 모두 동일하되 개개인이 자기의 사회적 역할에 따른 명분에 따라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이 義이다.

인륜은 인간 개개인의 도덕률일 뿐만 아니라, 사회 국가의 통치의 원리로서, 父子·君臣·夫婦 등의 名分에 의해 규정된다. 인륜은 명분을 사회윤리로 표현한 것이다. 명분은 바뀔 수 없으며,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그 지위(名)에 따라 上下·貴賤·尊卑와 職(分)이 정해져 있다. 모든 사회구성원이 자신의 직분에 맞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때 국가와 천하의 질서가 안정되고 민생이 안정된다고 보았다. 명분론은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의무만 강조되는 것이 아니라, 각기 職分에 따른 역할과 의무를 상호적으로 규정하고 책임을 묻는 것이다.

그러므로 김장생과 그 문인들은 명분사상과 인륜사상을 내용으로 하는 禮治를 최고의 목표로 삼았으며, 군주는 군주의 역할, 신하는 신하의 역할, 부모는 부모의 역할, 자식은 자식의 역할을 본래 지닌 어진 마음으로 명실상부하게 수행할 때, 국가 사회가 안정된다고 보았다. 사회구성원 각자의 사회적 지위(名)에 따른 職分과 태도의 당위성을 윤리도덕으로 규정한 것이다.

2. 朝鮮後期 社會變化에의 영향

김장생의 예학은 려말선초 이래 불교의 禮俗에서 주자학적 예 문화에로의 지속적인 변화, 그리고 특히 16세기말 17세기초 양란 이후 조선후기 국가사회의 급속한 변화에 따른 사회재편의 과정에서 성립된 性理學的 禮制이며, 그 禮制와 체계적인 근거이론은 역으로 조선후기 사회변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김장생이 예제 시행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가례}는 宗法이 토대이며, 종법은 조선 사회질서의 근간이었다. 김장생 이후로 17세기 조선예학이 조선 사회에 미친 가장 큰 사회적 영향이 바로 종법질서의 확립이었다.

김장생의 예학 이후 조선의 예학은 종법을 천하의 公禮로 삼아, 국가 사회에 실현한다는 의지를 일관하여 펼치게 되었는데, 그 제일의는 '父子之義'의 확립이다. 가례의 의리 가운데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親親의 의리로서, 예의 전제는 仁을 시행함에 仁을 시행하는 대상과 자신과 親疎의 의리(親親之殺)에 따라 차등 있게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장생의 예학이 한국 예학사에 미친 영향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국가의 典禮에 대한 統의 수립이었다. 김장생 예학의 근간은 宗法을 통한 '統'의 수립이며, 不二統·無二尊·無二斬으로 대변되는 統의 수립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喪禮의 服制를 바로잡는 일이었다. 복제는 高祖에서 玄孫까지 9代의 上下와 同高祖인 8寸 형제자매간의 左右에 이르기까지 位階를 바로잡는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김장생은 인조반정으로 인하여 生父인 定遠君의 祝文稱號 문제, 정원군의 元宗追崇 문제, 啓運宮(仁獻王后)의 服喪 문제 등 왕실의 典禮에 變禮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김장생은 사사로운 情에 이끌리어 過禮를 범하는 임금에 대하여 宗統과 王統을 왕도의 입장에서 해결할 수 있는 典禮를 제시하였다.

김장생은 仁祖가 비록 宣祖의 손자이지만 선조의 왕통을 계승한 이상 宣祖-仁祖는 부자의 도리가 있으며, 따라서 생부와는 부자의 도가 아니므로 생부에 대하여 '考'라고 칭할 수 고 없고 3년상을 지내서도 안된다고 주장했다.

김장생을 비롯한 조선시대의 성리학자들이 종법을 중시한 까닭은 {近思錄} 권9와 {性理大典} 治道編 등을 통하여 소략하나마 살펴볼 수 있다. 그 내용의 특성은 종법을 天理로 이해하고, 宗法이 人心을 하나로 모으고 국가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여기어 治道의 하나로서 논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요지는 종법으로 사회안정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한 것이다.

조선 정부는 건국초기부터 종법을 사대부가에 널리 시행하도록 권장하였으나, 16세기 이후에야 가문과 문벌로서 자신들의 신분을 유지하는 경향이 나타나서, 族譜와 書院?祠宇 등을 세워 가문의 지위를 높이고 현창하는 사업이 광범위하게 시행되었으며, 특히 임진?병자 양란 이후에는 양반뿐만 아니라 일반 常民들도 동족을 결합하는 경향이 강화되었다.

그러한 경향은 16세기 이후 성리학의 발달로 인하여 성리학적 질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한편으로는 양란을 거치면서 국가적 위기와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개인과 가정에 대한 국가의 보호는 한계가 있다고 인식되었으므로, 각 가정과 종족을 보호할 자구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현실적 필요에 따른 것이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전국적으로 宗族조직을 형성하여 同族地緣共同體를 이루는 현상이 확산되었다.

이러한 사회변화에 따른 종족질서의 정립은 시급한 문제였다. 김장생의 예학은 종통을 중시하여 宗子와 家長의 지위를 확립하는 문제가 요점이었으며, 이러한 김장생의 예학은 조선후기 사대부들의 공감속에 급속히 확산되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17세기는 친족제도 변화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기라고 이해된다. 門中의 조직을 강화하고 祭位土를 늘려가는 현상이 급속하게 확산되었고, 흩어진 族人들을 확인하고 규합하기 위해 族譜 발행이 성행하였다. 또한 상속제도에 있어서도 자녀간에 차별을 두기 시작하여, 長子를 우대하고 女息을 상속대상에서 제외하는 長子優待 불균등상속이 확립된다. 이러한 재산상속의 확립으로 제사의 子女輪廻나 外孫奉祀가 없어지고, 양자제도가 활성화되었다. 庶子나 女息이 있어도 父系 遠族에서 양자를 구하여 부자상속을 하게 되었다.

김장생 이후 예학이 급속하게 발전한 17세기는 조선 초기 이래로 정착시키고자 했던 종법질서가 완전하게 정착된 시기로, 종법질서의 확립으로 인해 한국의 친족제도는 부계 중심적 특성을 지니게 되었고, 문중 중심적인 사회질서가 확립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가족생활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종족집단에서 宗子와 가부장의 권한이 강화되고, 검박하고 근면한 부인상이 확립되었다. 혼인문제에 있어서는 동성동본간의 혼인과 과부의 재가를 금지하였다. 여자는 부계가족을 위해 희생하여 재혼을 하지 않는 열녀를 이상형으로 삼아 수절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회현상은 父子관계의 親疎性(親親)에 따른 인륜질서를 토대로 하여 가정과 사회의 안정을 이루어 내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에 따라 종법질서를 바탕으로 한 齊家的 측면은 사회질서와 국가안정 유지에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게 되었다.

Ⅴ. 現代 韓國社會에 미친 영향

김장생의 학문과 정신은 '眞知'의 탐구요 그 실천이라고 요약할 수 있으며, 인간의 善意志야 말로 사회의 正論과 秩序의 기반이라고 생각하여 선의지를 기르기 위해 예를 통한 자기 수양을 강조하였다. 이에 따라 예 연구의 수준을 높여 김장생 이후 예학은 학문의 한 영역이 되었으며, {가례} 중심의 예 시행방침은 조선 후기 禮行의 기반이었고, 일반 백성의 삶 속에 실천하도록 보편화되었다.

또한 명분사상과 인륜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도학정치의 이상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하여 禮治를 강조했으며, 宗法을 통한 統의 수립을 이루어 孝悌忠信의 사회적 기풍을 정립하려 한 사회정치사상은 17세기 이후 조선후기 사회정치와 사회변화의 방향이 되었다.

이러한 김장생의 眞知실천정신과 예학사상은 병자호란 이후 王道를 높이고 覇道를 반대하는 강력한 춘추정신으로 계승되었으며, 산림정신은 후대 도학자들의 모범이 되어 조선후기 기호학파의 학문과 정신으로 이어지는 데에 큰 역할을 담당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러 가지 점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고 되새겨야할 가르침을 드리우고 있다.

첫째, 김장생의 학문과 사상은 인간의 부정한 마음을 제거하고 선한 본성에 따라 사는 인격에서부터, 仁義의 인도주의에 따른 세계평화 질서의 성취에 이르는 유학의 전체 규모를 잘 보여 주고 있다. 김장생은 인간의 이기심을 절제하여 겸양과 생명존중의 어진 본성을 발휘하고 비인도적인 폭력과 부조리를 제거한다는 두 측면, 즉 개인의 인격과 사회정의는 불가분의 연속선상에 있다는 인류문화 방향의 진면목을 실천적으로 드러내었고 이러한 정신은 오늘날에도 한국인의 정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둘째, 급속한 산업화와 세계화에 따라 한국인의 가치관은 많은 변화를 겪고 있지만, 아직도 한국인의 전통적인 도덕사상이나 도덕규범은 人本主義, 孝道倫理, 仁義·禮讓·潔白·貞節·忠節의 윤리정신에 기반하고 있다. 이러한 고유의 전통 도덕과 규범은 김장생의 예학사상에 담겨진 본령이었다. 김장생의 의례정신은 정치의 지도이념은 물론 일반민중의 생활규범으로 되어왔으므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행동과 의식구조를 뿌리깊게 내재해 있다.

셋째, 한국은 전통적으로 유교의 예치주의·덕치주의를 위주로 했으며, 법의 기능은 예를 보완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법의 제정과 시행은 禮의 준수를 기본으로 하며 禮를 강제하고 違禮행위를 처벌함에 있었다. 이러한 한국인의 전통적인 윤리의식과 법의식은 유교의 영향이며 김장생은 그러한 영향의 한 복판에 위치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런데 과거의 봉건적 사회문화에서 본다면, 예는 사람과 사람과의 사이에 일정한 형식을 부과하여 상위자의 지시에 맹목적으로 복종하게 하는 지배-피지배 관계를 성립하게 하는 것으로, 예를 강조하여 인간관계를 貴賤尊卑의 관계에서 생각하고 신분적 위계질서를 확립하는데 목적을 둔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사실 조선사회의 예문화는 그러한 불평등한 양상을 드러내기도 했다. 유교의 禮 내지 도덕규범은 통치자를 위한 윤리였으며, 피지배자가 지배자에게 굴복할 것을 요구하는 정치도덕이요, 권력자·통치자·상위자가 그 지위를 확보하고 이를 옹호하기 위한 정치윤리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예의정신은 불평등이 아니라, 각자 가정이나 국가에서의 역할에 따른 책임과 의무의 내용이 구별된다는 의미이다. 한 쪽은 일방적으로 의무만 지고 다른 한 쪽은 권리만 행사하는 관계가 아니라 쌍방이 모두 의무와 권리를 가진다는 의미는 오늘날의 민주주의 사회에 있어서도 가치있는 사고 방식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예는 言行만이 아니라 종법질서에 기초한 儀禮의 관·혼·상·제에 이르기까지 복잡다단하여 繁文縟禮의 폐단을 초래한 空理空談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비판하기도 하는데, 宗法에 따른 統의 확립을 중시한 점은 김장생이 체계화한 예제의 특징이다. 그러나 그 본질은 이러한 禮行을 통하여 개개인은 부자지간에 행해지는 순수한 마음을 확장하고 사회의 일원으로서 자기 위치에 따른 역할을 다하게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자유와 평등의 이념하에서 가부장적 권위 구조를 비판하기도 하지만, 당시 김장생을 비롯한 예학자들의 이상은 父兄의 慈愛와 子弟의 효도와 우애를 바탕으로 가족의 친목과 경제적 유대를 실현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와 국가의 안정을 성취하고자 한 것이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김장생은 종법질서를 보편원리(天理)라고 인식하고 종법의 統의 질서로 국가사회를 안정시키려고 했다. 親親의 원리를 사회의 기초원리로 삼아, 17세기 후반 양란으로 파괴된 국가사회를 재건하려고 한 것이다. 이러한 김장생의 예사상과 그 정신은 인간의 상호교류가 힘에 의한 지배?복종의 관계가 아니라 인간의 어진 마음과 바른 마음으로 서로 대하는 신뢰의 관계를 추구하고 구체화한 인도주의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한 의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호의 권리와 의무를 존중하는 謙讓과 調和의 정신, 自己節制를 통한 人格의 完成을 기약하는 克己復禮의 정신은 사회양상이 다양해지고 첨예한 이익관계가 지배적인 오늘날의 현실 속에서 더욱 되살펴 볼 귀중한 정신이며 또한 계승 발전시켜야 할 가치라고 생각된다.

이와 같이, 이러한 김장생의 학문과 사상은 오늘날에도 인간성의 함양, 바람직한 가정관, 책임있는 사회적 역할 등 한국인의 가치관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참다운 인격완성과 건전한 가정, 문화국가로서의 한국미래 건설을 위해 되새겨야할 가르침을 여전히 드리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