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독재전서 해제

한기범 韓基範

(韓南大學校 敎授)

1. 머리말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는 조선 중기의 유현인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1574∼1656)의 문집(文集)이다. 선생은 율곡(栗谷) 이이(李珥)-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적전(嫡傳)으로, 특히 부사(父師)인 사계의 예학을 계승하고 체계화하여 사계와 함께 조선예학(朝鮮禮學)의 수립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 예학자이다. 선생은 또한 인조반정과 병자호란 이후의 혼란스런 정치 사회를 바로잡는 데 앞장 선 대표적인 산림(山林)이었으며, 출중한 학문과 돈독한 예행(禮行)으로 17세기 선비의 전형을 보여 준 모범적인 유현(儒賢)이었다.

선생의 문인인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 등은 효종조 이후 서인계 산림의 대표적 인물들이며, 이른바 산당(山黨)의 중추로서 선생과 더불어 당시의 정치와 학문과 사상의 중심에 서 있었던 인사들이었다. 따라서 17세기 조선의 정치사와 사상사 및 예생활사를 바르게 살피기 위해서는 이러한 선생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가 필수적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점에서 그의 문집인《신독재전서》는 이 분야를 이해하고 연구함에 있어서 매우 긴요한 연구자료가 된다고 하겠다.

본고에서는 먼저《신독재전서》의 연혁과 체제 및 그 내용을 개관하고, 다음으로 선생의 생애와 학문·사상을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2.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의 연혁과 체제 및 내용

선생의 문집이 세상에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숙종대에 간행된 것으로 알려진《신독재유고(愼獨齋遺稿)》이며, 이 유고에 빠진 내용들을 새롭게 첨가하여 재편한 것이 곧《신독재전서》-이하《전서》로 통칭하기로 함-이다. 이 문집의 원본들은 현재 서울대 규장각 및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신독재유고》는 15권 7책(원본 13권 6책, 부록 2권 1책)으로 구성된 선생의 최초의 문집이다. 그것이 처음으로 발간된 연대가 언제인지는 상세히 고증되지 않으나,《동국문묘십팔현연보(東國文廟十八賢年譜)》에 의하면, 1710년(숙종36) 여름에《유고》15권을 간행하였다고 한다

한편《전서》의 간행 연대에 대해서는《전서》에 수록된〈연보〉의 관계 기사가 참고된다. 즉 선생의 8대손 김상현(金尙鉉)이 쓴〈연보〉발(跋)에 "문경공(文敬公)의 연보를 오래도록 완성하지 못하다가 선생 사후 200여 년이 지나서야 간행하게 되었다."라 하고, 그 작성 연대를 임인년(壬寅年)으로 적고 있으며, 또〈연보〉말미에 "그 21년 후 임술년(壬戌年)에《전서》가 이루어졌다."라고 되어 있는 것이 그것이다. 여기서의 임인년은 선생의 사후 200년 뒤의 임인년이므로 곧 1902년에 해당하고, 그로부터 21년 후의 임술년은 1922년이니, 곧《전서》의 간행 연대가 된다. 이《전서》는 이 해에《사계전서(沙溪全書)》와 함께 합본되어《사계신독재전서(沙溪愼獨齋全書)》(상·하)로 출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서》의 구본인《신독재유고》에는〈의례문해속(疑禮問解續)〉과〈연보(年譜)〉등이 들어 있지 않다.〈의례문해속〉은 선생의 유고 중 제일 먼저 간행된 것(1643년)이므로 유고 구본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연보〉는 1871년(고종 8)에 족손(族孫)인 김기홍(金箕洪)·김재근(金在謹) 등이 편집하고 김재언(金在彦)이 교정한 것을 사손(嗣孫) 김영종(金永宗)이 간행한 것인데, 그 뒤 1902년(광무 6)에 중간(重刊)된 것을 이 때 와서 비로소《전서》에 합본하게 된 것이다. 이《전서》는 원집 16권과 부록 4권, 도합 20권 9책으로 되어 있다.

《전서》에는 선생이 평생동안 쓴 2백여 편의 시(詩)와 다양한 상소문과 논문, 편지글 들이 주류를 이루지만, 이 외에도 그의 생애를 정리한 연보(年譜), 행장(行狀), 시장(諡狀) 등이 들어 있고, 특히 그의 상소(上疏), 주사(奏辭), 서간(書簡), 예서(禮書) 등에는 선생의 심오한 정치사상과 사회사상, 그리고 예학사상 등이 주옥 같은 빛을 발하고 있다.

《전서》의 편집 형식은 대개《율곡전서》의 체제를 모방하였다. 단,《전서》의 권수(卷首)에는 '범례(凡例)'가 따로 없는데, 이것은 임술년 같은 해에 같은 체제로 편성되어 합본된《사계전서》의 권수가 범례로 통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서》의 편차는《신독재유고》의 그것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내용에 있어서는〈의례문해속〉과〈연보〉가 새로 추가된 외에 크게 달라진 것은 별로 없다.《전서》의 내용을 편제 순서에 따라 차례대로 개관해 보면 다음과 같다.

3. 신독재 선생의 생애

선생의 이름은 집(集)이고, 자는 사강(士岡)이며, 호는 신독재(愼獨齋)이고,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다. 선조 7년(1574) 사계 김장생의 2남으로 서울 정릉동제(貞陵洞第)-지금의 덕수궁 옆 구 대법원청사 자리-에서 태어났다. 광산김씨가(光山金氏家)의 전언에 의하면 이 곳은 사계, 신독재, 동춘-부 송이창(宋爾昌)은 사계의 종매서(從妹壻)이다.-등 3현의 출생지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이 곳을 삼현대(三賢臺)라 칭했다 한다. 그의 어머니는 창녕 조씨(昌寧曹氏)로 창녕군(昌寧君) 조광원(曺光源)의 손녀이고, 중추부사 조대건(曺大乾)의 따님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총명이 유별했던 것 같다. 그가 겨우 말을 배우자 손가락을 입에 세워 "이것이 중(中) 자이다."라 하니, 조부 황강(黃岡) 김계휘(金繼輝)가 기특하게 여겨 늘 말하기를, "우리 집을 창대하게 할 사람은 필시 이 아이일 것이다."라 하였다. 선생은 5, 6세에 글을 읽고 7, 8세에 문리가 통달하여 천곡(泉谷) 송상현(宋象賢)과 귀봉(龜峯) 송익필(宋翼弼)에게 나아가 배웠는데, 이 때 그가 지은 대부송(大夫松)이라는 시(詩)를 보고 당대의 문장가 간이(簡易) 최립(崔?)은 그 재능을 크게 칭찬하여 "문장의 수법(手法)이다."라 했다 한다.

선생이 소년기에 나아가 배웠던 스승들은 모두 아버지인 사계와 긴밀한 관계를 지닌 인물들이었다. 천곡은 사계와 막역한 친구였고, 귀봉은 곧 사계의 스승이었으니 양대가 그의 지도를 받은 셈이었다. 그러나 이 때 송상현은 주로 외직을 맡아 지방에 가 있거나 질정관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오는 등 외방이나 이국에 체류한 기간이 대부분이었고, 그나마 임진왜란 때에는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나갔다가 장렬한 전사를 하게 됨으로써 실제로 신독재가 그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시간은 별로 많지 않았던 것 같다. 또한 귀봉 역시 선생이 13세 되던 해(1586년)부터 그 가문이 모두 안씨가(安氏家)의 노비로 다시 환속됨에 따라 쫓기는 신세였으므로 사실상 그로부터의 계속적인 수학은 역시 어렵게 되었다. 따라서 선생이 양 선생으로부터 제대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기간은 대략 소년기의 3, 4년이 아니었나 한다.

선생은 소년 시절에 연이은 가정적 불행을 겪어야 했다. 9세에 조부 황강의 상을 당하였고, 13세에 어머니 조부인의 상을 당하였다. 이 때 어린 선생은 집상(執喪)하는 부친을 따라 모든 절차를 마치 성인과 같이 예절대로 삼가 행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모친상 후에는 평생의 신병을 얻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훗날 조선조 예학의 대가가 될 만한 선생의 기본적인 성품과 자세를 이로써 읽을 수 있고, 예학의 종장인 부친 사계를 모시고서 배우고 익힌 이러한 예절과 가정의 분위기가 후일 선생의 학문과 처신에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생각된다.

선생은 18세(1591,선조24)에 진사시 2등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그의 연보에서, "선생은 가정에서 수학하였는데, 과거를 기뻐하지 아니하였다. 비록 부친의 명으로 과거(科擧)에 힘쓰기는 하였으나 여러 번 세상의 변화를 겪고서는 진취할 뜻이 없었다."고 적고 있는 것을 보면, 대과(大科)에 크게 뜻을 두지는 않았던 것 같다.

선생이 40세가 되던 광해군 5년(1613)에 그의 가문에 커다란 충격을 준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났다. 이 옥사는 박응서(朴應犀), 서양갑(徐羊甲) 등 명가의 서자 7인이 모반을 계획하고 국구 김제남(金悌男)과 영창대군(永昌大君)이 관련되었다 하여 이들을 모두 주살하고, 또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여 서궁에 유폐시킨 정치적 음모 사건을 말한다. 그런데 이 사건에는 선생의 서숙(庶叔)인 김경손(金慶孫)과 김평손(金平孫)이 7인중에 포함되어 양인이 모두 고문을 받다가 죽어 육시(戮屍)를 당하였으니, 이로 인하여 선생의 가문은 온통 연좌형(連坐刑)을 당할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모반죄로 참극을 당한 피의자들이 한결같이 사계의 관련을 완강히 부인하고, 해당 관부에서 법적으로 연좌될 수 없음을 밝혔고, 또한 대신들이 사계의 면죄를 적극 건의하여 마침내 연좌는 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때 선생은 부친의 임소(任所)-당시 사계는 철원 부사(鐵原府使)였다.-에 가 있다가 무옥(誣獄)의 소식이 있자 부친과 함께 서울로 와서 초조히 하회(下回)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일이 일단락 되자 부친을 따라 고향 연산(連山)으로 돌아왔다. 송준길이 지은 선생의 시장(諡狀)에는 이 때의 상황과 당시 선생의 심경에 대해 "드디어 노선생(老先生)을 모시고 연산으로 돌아오니 이 때 천지는 암흑 세계로 접어들고 윤리는 두절되었다. 선생은 종적을 숨기고 뜻을 기리면서 평생을 마무리하려고 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선생이 난세를 당하여 이렇게 윤리의 두절을 통탄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만큼 윤리 재건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것으로 생각되고, 이러한 경험은 훗날 그의 예론의 전개에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연산에 돌아온 사계는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다시 벼슬에 나가기까지 10여 년 간을 두문불출하면서 오로지 경서를 연구하고 후학을 가르치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이 기간 중에 사계의 대표적 경서 연구인《경서변의(經書辨疑)》가 완성된다. 이 때의〈신독재연보〉에는 "노선생이 계축 이후 두문불출하여 강학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선생이 종일토록 모시고 앉아서 좌우를 삼가 행하고 지물지양(志物之養)을 다 갖추면서 성리학(性理學)에 침잠하기를, 10년여를 하루와 같이 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아버지 사계의 문하에서 성리학에 침잠하였던 선생의 면학 자세를 살필 수 있거니와, 그가 부친의 가르침을 집중적으로 받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가 아니었나 한다.

선생이 50세가 되던 1623년은 인조반정으로 정국에 일대 변혁이 일어난 해였고, 개인적으로도 새로운 변화가 있었던 해였다. 반정으로 탄생된 서인 집권세력은 그 중추가 사계의 친구들과 문인들이었다. 이들의 반정 명분은 두 가지였으니, 곧 광해군의 살제폐모(殺弟廢母)의 패륜을 바로잡고, 의리(義理)를 저버린 잘못된 대명외교를 바로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유림의 지지를 얻고 윤리 질서를 재건하려는 의도에서 산림(山林)을 중앙 정계에 적극적으로 초청하였다. 이러한 산림의 중용은 반정 세력에 대한 유림의 지지를 획득할 수 있다는 실리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명청(明淸) 교체기의 화이론(華夷論)적 사고의 혼란을 진정시키고 명분과 질서를 바로하려는 의도를 포함한 것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분위기에서 인조 이후의 중앙 정계에는 많은 서인계 산림들이 대거 등용되었는데 그 중 최우선으로 부름을 받은 인물이 사계 김장생이었고, 이 때 선생 역시 학행으로 천거되어 부여 현감(扶餘縣監)에 제수되었다.〈연보〉에 의하면 처음에 연신(筵臣)들은 선생을 초빙하여 사헌부의 일을 맡기려고 했으나 선생이 편양(便養)-지방관을 맡아서 부모를 공양하기에 편함-을 위해 한사코 지방관을 희망하여 결국은 부여 현감을 제수하였다고 한다.

부여에 부임하여 선생은 제일 먼저 학교를 세우고 군정(軍政)을 바로 잡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다. 읍치(邑治)를 오직 교양을 기르고 가르쳐 인도하는 방법으로 하였으므로 모든 행정이 그 마땅함을 얻었고, 교화(敎化)가 부여 일원에 두루 행해져 쟁송(爭訟)이 그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날마다 읍중의 자제와 더불어 강론하기를 그치지 아니했다. 그러나 선생은 부임한 지 4년만에 신병으로 사임하였는데 부여의 사민들은 추후에 그를 사모하여 송덕비를 세웠고, 사후에는 사림이 그 곳에 서원을 세워 이경여(李敬與)와 함께 그를 제향하였으니, 지금의 부산서원(浮山書院)이 곧 그것이다.

선생이 부여 현감에서 물러난 지 넉 달 후에 조정은 다시 그를 승진시켜 임피 현령(臨陂縣令)에 제수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7개월만에 다시 직을 버리고 귀향하였고, 이어서 세자익위사 위솔(世子翊衛司衛率)과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 등을 제수하였으나 모두 출사하지 아니했다. 그가 처음부터 이사(吏事)를 기뻐하지 않은데다 또 80이 넘은 부사(父師)를 가까이에서 공양하고자 한 때문이었다.

선생이 60세가 되던 해 부친의 삼년상을 마치게 되자, 그 이듬해부터 조정에서는 선생을 중앙의 요직으로 계속 불렀다. 이후 선생이 제수받은 중앙 요직은 정5품인 사헌부 지평으로부터 종1품의 판중추부사에 이르는 다양한 것인데 그 회수는 30여 회를 넘는다. 그리고 그것의 대부분은 사헌부, 승정원, 육조, 세자시강원 등 부서에 집중되어 있다. 이는 당시의 국왕이나 정부가 선생에게 어떤 역할을 기대하고 있었는지를 감지하게 하는 것이며 또한 그의 성품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가 언론 감찰기구인 사헌부에 14회나 징소되고 그 장(長)인 대사헌도 7회나 제수된 것을 보면, 유림의 지지가 높은 그를 통하여 나라의 풍도를 바로잡으려는 기대가 있었을 것이고, 또한 승정원의 승지에 제수하고-이 때 선생은 경연 참찬관을 겸임하였다.- 세자시강원의 임무를 맡기고자 한 것은 예학(禮學)으로 무장된 노성숙유(老盛熟儒)의 가르침이 필요했던 때문이며, 특히 실무 행정부서인 육조의 예조와 이조에 중임되고 이조 판서에까지 이르게 된 것은 산림에 대한 단순한 예우 이상의 적극적인 산림 중용의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생각된다.

선생의 출사는 50대에 시작되었고, 그나마 중앙 정계의 진출은 60세 이후에야 이루어진 것이었는데, 그것도 효종 즉위(1649년) 이전에는 사실상 적극적인 정치 활동은 거의 없었다. 60대 전반에는 주로 사헌부에, 60대 후반에는 주로 승정원에 보직되었으나〈연보〉에 의하면 사실상 그가 승지로 있던 때에 경연에 나아간 것 외에는 조정에 들어가서 봉직한 일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이것은 인조가 산림을 대거 징소하기는 하였으나, 실은 산림의 의견을 국정에 반영시키려는 노력이 미흡했던 데에서 기인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선생은 효종 즉위 초에 다시 산림으로 징소되었다. 이 때 그는 이미 76세의 고령이었지만, 효종의 북벌 의지와 그에 대한 왕의 특별한 권우(眷遇)를 뿌리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이 때 그의 문인들인 송준길, 송시열, 이유태 등과 공주(公州) 산림인 권시(權?) 등이 함께 출사하였는데, 이들 5인이 북벌을 위한 세칭 1차 밀지오신(密旨五臣)이다. 선생에 대한 효종의 예우는 각별했고, 마침내는 선생에게 이조 판서의 직임이 주어졌다.

그러나 선생은 이조 판서가 된 지 얼마 안 되어서 우상 잠곡(潛谷) 김육(金堉)과 심각한 대립이 발생하여 곧 퇴임하였다. 이 사건의 표면적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처음에 잠곡이 효종에게 호서대동법의 시행을 청하였는데, 왕이 이를 선생에게 물어 보니 선생이 이를 불가하다 하고 오히려 원로 대신에게 물어서 인재를 불차탁용(不次擢用)하자고 제의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잠곡이 상소하여 인사 문제는 군주의 대권이니 신하들이 이를 함부로 할 수 없다고 맞섬으로써 양인이 마침내 불협하게 되었다. 여기서 선생이 대동법의 시행이 불가하다고 한 것은 그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그가 효종에게 "대동법은 백성을 편리하게 하고 나라를 부유하게 하자는 것이니 그 의도가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다만 정치의 체통(體統)이 서지 아니하고서 어찌 절목(節目)에 대한 일을 먼저 행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이 법을 졸속하게 행하여 먼저 민심(民心)을 잃게 된다면 후회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진언하고 있는 데서 보는 바와 같이 일의 순서로 볼 때 인재를 등용하여 나라의 체통을 바로하는 일이 더 급한 일이라는 인식에서 온 것이었다. 이것은 그의 일관된 근본론(根本論)적 사고의 소산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것은 양인의 정책적 대립이었으나 그들의 정치적 배경을 보면 그것은 곧 산림 출신의 산당(山黨)과 훈구 공신 중심의 한당(漢黨)의 대립이기도 한 것이었다.

사세가 이렇게 되자 선생은 곧 관직을 버리고 연산으로 낙향하였다. 그리고는 왕에게 상소하여 그가 잠곡 김육과는 오랜 친구의 정의가 있고 서로 잘못된 혐의가 없는데 대동법의 의논이 부합하다 하여 일장의 야료가 있었으므로 아랫사람의 도리로서 당연히 사퇴한 것이라고 밝히고, 그러나 은퇴하는 이유는 이 한가지 일뿐 아니라 늙고 병이 위급하여 국은에 보답할 수 없는 탓이라 하였다. 선생이 이조 판서에서 물러나자 잠곡의 사직 상소도 받아들여져서 이 일은 일단락되었다. 선생에 대한 사림 및 효종의 기대와 선생 자신의 정치 사상적 개혁 의지가 이로써 무산된 것은 안타깝지만 당시의 정치적 분위기가 아직 산림이 세도(世道)를 담당할 만한 분위기가 되지 못하였고, 또한 선생의 나이가 이미 76세의 고령이어서 어찌 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이듬해에는 실각한 공신 김자점(金自點)이 세력을 만회하기 위하여 효종과 산림의 북벌 기도를 청(淸)에 밀고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김자점은 이 때에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과 선생이 북벌의 영수(領袖)라 하였으므로 청의 사절이 나와서 책문하게 될 때 중외가 진동하였다. 그러나 이 때 선생은 이미 낙향하여 야인으로 있었던데다가 이시방(李時昉), 원두표(元斗杓), 이경석(李景奭) 등이 주선하고 효종이 미봉하여 사태는 잘 수습되었으나, 선생은 이 일로 해서 세상에 더욱 뜻이 없게 되었다.

이후에 선생은 대사헌, 이조 판서 등의 관직으로 거듭 징소되었지만 일체 출사하지 않고 연산에 은거하면서 조야와 문인들의 문례(問禮)에 답하고 예서의 정리에 노력하다가 83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선생은 사후에 청음 김상헌과 함께 효종조의 묘당에 배향되었고, 또한 고종 20년에는 문묘에 종향되었다. 그리고 향리인 연산의 돈암서원과 창주서원, 봉암서원, 월봉서원, 부산서원 등에 그의 위패가 봉향되어 있다.

선생은 일생 동안 예학 연구와 예의 보급에 진력하였고, 그 스스로가 돈독한 예행으로써 전형적인 예가의 모범적인 삶을 살았으므로, 동춘 송준길은 선생의 일생을 요약하여 "그 몸을 예에 바쳐서 일생을 마치었다.[役身於禮以終己身]"고 평하였다. 이상으로써 우리는 선생의 산림(山林)으로서의 정치 사회적 역할이 어떤 것이었고, 또한 학자로서의 학문과 덕망과 예행이 어느 수준이었는지를 가히 짐작할 수가 있다 하겠다.

4. 신독재 선생의 학문과 사상

조선 사회는 유교이념, 특히 성리학적 사고가 지배해 온 사회였다. 선생의 학문과 사상 역시 예외가 아니었으니, 선생의 성리학과 예학 및 그 사상이나 정치사상, 문학사상 등도 한결같이 성리학적 원리에 충실한 것이었다.

선생은 율곡-사계로 계승된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적전이었으므로, 당연히 성리학에도 출중하였지만, 선생의 저술 속에서 이기론(理氣論)만을 따로 떼어서 논하고 있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는다. 선생의 논설은 대체적으로 예학적인 것이며, 성리설은 단지 그의 상소문이나 행장 등에서 단편적으로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예학이 필수적으로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전제로 하는 것이라고 할 때, 이 점은 오히려 선생이 성리학설에 있어서는 도통적 적전인 부사(父師)의 성리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기론에 있어서 사계는 일찍이 혼융무간설(混融無間說)을 주장하였다. 즉 이기(理氣)는 원래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이고, 또한 원래부터 혼융하여 간격이 없다는 것이니, 그것은 연원으로는 율곡의 이기지묘(理氣之妙)를 따르는 것이었다. 신독재는 이러한 사계의 성리설에 대해서 "실로 격언(格言)이다."라 하여 적극적으로 찬동하고 있는 입장을 표명하였다.-《사계전서(沙溪全書)》황고사계선생가장(皇考沙溪先生家狀)- 선생의 이러한 이기적 입장은 또한 주자의 이기불리부잡(理氣不離不雜)의 논리와 상통되는 것이었다.

인심도심론(人心道心論)에서 선생은 주자와 마찬가지로 인심을 악(惡)으로 규정하지는 않았다. 인심은 단지 인간의 감성적 욕구를 말한 것일 뿐이며, 악은 사실상 인욕(人欲)을 이르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악으로 흐르지 않기 위해서는 인심(人心)-인간의 감성적 욕구-이 도심(道心)-인간의 도덕적 의식-에 의해 통제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즉 인심이 도심의 명령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성리학적 입장은 그의 정치사상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예컨대 선생은 경연(經筵)에서 인조에게 "인군(人君)의 한 마음〔一心〕은 만가지 변화〔萬化〕의 근본입니다. 인군이 진실로 본원을 맑고 깨끗하게 하고 그 발하는 바를 정밀하게 살펴서 반드시 도심(道心)이 항상 주가 되게 하고, 인심(人心)이 매번 그 명령을 듣게 한다면, 날마다 쓰는 사이에 천리(天理)가 유행하고 인욕(人欲)이 물러나서 모든 사물에 중절(中節)하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권면하였다.-《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연석주사(筵席奏辭)-

선생은 인심이 도심을 따르게 하는 것이 치심(治心)의 원리이며, 이를 실천하는 기본은 성실(誠實)에 있다고 인식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경연주사(經筵奏辭)에서 "치심지요(治心之要)는 성실보다도 우선할 것이 없습니다."라 하였다.

선생은 이러한 인심도심론에 바탕한 군주수신론(君主修身論)이 유교적 이상 사회를 실현하는 근본이라고 강조하면서도, 군주의 수신이 자동적으로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 군주의 수신에 더하여 선생이 효종에게 제시한 군주의 실천 요강은 회덕량(懷德量)-사욕을 억제하여 덕량을 넓힐 것-, 입기강(立紀綱)-성심을 공평하게 하여 기강을 세울 것-, 엄궁위(嚴宮浬)-사사로운 연민을 끊어서 궁중을 엄히 할 것-, 용현량(用賢良)-임금의 감식을 잘 밝혀서 어진 인재를 등용할 것-, 휼민지본(恤民之本)-사치하지 말고 검소함을 숭상하여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본이 될 것-, 책실효(責實效)-형식을 버리고 실효를 좇을 것-등 여섯 항목이었다. 효종이 즉위 초에 북벌을 추진할 때 선생을 이조 판서로 삼은 이유도 단순한 '산림의 중용'이라는 상징성 이외에, 이와 같은 선생의 실질적이고 실용적인 정치적 식견을 중시한 측면이 또한 없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선생은 효종 이후 일세의 산림(山林)의 영수로서 대외적으로는 반청사상(反淸思想)을, 대내적으로는 윤리 질서의 재건을 목표로 하는 정치론을 제시하였다. 선생은 중화주의적(中華主義的) 반청사상을 분명히 하였다. 그것은 유교적 도덕주의를 중시하는 중국과 조선을 화(華)로 보고, 이 나라들을 무력으로 유린하고 그 문화적 정통성을 부인하는 청을 이(夷)라고 규정하여 배척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반청사상은 그의 문인들에게 계승되어 이후 북벌사상과 '조선 중화주의 사상'으로 발전되었다. 그리고 윤리 질서의 재건이라는 그의 대내정치의 목표는 그의 산림적 정치 활동으로서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학문적 특성인 예학의 정리와 보급을 통하여 추구되고 있었다.

선생의 예학〔愼獨齋 禮學〕이 성립될 수 있었던 배경은 당시 조선의 학문 발전의 일반적 추세와 시대 상황, 그리고 선생의 가학(家學)과 기호학파의 예학적 전통에서 찾아질 수 있다. 선생이 살았던 17세기는 성리학〔이론의 학〕의 전성에 뒤이은 예학〔실천의 학〕의 발달이 이루어지고 있는 때였다. 그것은 학문발전상의 자연스런 추세이기도 했지만, 또한 당시의 시대 상황과도 밀접한 관련을 지니는 것이었다.

17세기는 산림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산림의 정치적, 사회적, 사상적 역할이 크게 작용하고 있던 때였다. 인조반정 이후 사계는 산림의 상징적 인물이었으며, 선생 역시 이러한 사계를 뒤이어 인조, 효종 대에 산림의 영수로 활약하였다. 따라서 그의 예학적 동기는 이러한 그의 산림 활동과도 깊은 연관을 지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가정의 예학적 전통과 그 자신의 기호학통적 예학 계보와도 깊은 관련을 지니는 것이었다.

율곡·귀봉-사계-신독재로 이어진 기호학파의 예학 경향은 공자-맹자-주자로 전승되어 온 이른바 도통적 예학 경향을 그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주자의《가례(家禮)》는 그가 생전에 미처 교정을 마치지 못한 것이었고, 주자를 계승하고자 했던 율곡의 예학이나, 이를 발전적으로 계승한 사계의 예학 역시 신독재의 남은 보완 작업을 기다리고 있었다. 따라서 신독재 예학의 학문적 동기는 이러한 '도통적 기호예학의 완성'이라는 목표에서 발동된 바가 적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보다 절실했던 현실적 이유는 '예 질서의 재건'이라는 당시의 시대 과제와 산림의 영수로서의 선생의 책무에서 연원된 것이었다. 당시는 양란의 후유증과 광해군 시대의 비리를 바로잡고 반정 후의 새로운 정치 사회 기강을 수립해야 하는 격동과 변혁의 시기여서 '윤리 질서의 재건'을 포함한 새로운 질서 논리의 정립이 크게 요청되던 때였고, 이 때 선생은 사계를 이어 시대 정신을 이끌어 가야 하는 산림의 영수 위치에 서 있었다. 선생은 예학의 수립과 적용을 통한 예 질서의 재건이야말로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첩경이라고 인식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 위에서 그는 사계의 남겨진 예 관계 유고들을 정밀하게 고증하고 편집하여 그 예학적 업적을 완결시켰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기 자신의 예학을 체계화해 나갔다.

선생은 또한 그 스스로《가례》를 자주적 입장에서 수용 정리하고 특히 여기에 조선의 속례(俗禮)와 조선 학자의 예설을 적극 수용한〈의례문해속(疑禮問解續)〉을 편술하였으며 고례의 원리에 적합하지 못한 왕조례(王朝禮)를 일대 개혁하기 위해〈고금상례이동의(古今喪禮異同議)〉를 저술하여 왕에게 진달하였다.

〈의례문해속〉은 선생의 나이 70세 때에 이루어진 예문답서이다. 선생은 사계가 작고한 후 사계의 유고인〈의례문해〉를 꼼꼼하게 편집하고 정밀하게 교정하여 이를 체계화하였고, 이를 보완하는 뜻에서 자신의 예문답서인〈의례문해속〉을 편찬하였다. 이 예문답서는〈의례문해〉와 함께 당시 조선의 가례 실천의 실상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는 자료가 되며, 조선의 속례를 집성함으로써 자주적인 '조선예학'의 수립에 큰 기초를 수립한 예서였다고 평가된다.

또한〈고금상례이동의〉는 선생이 효종 초에 왕에게 진달한 예제 개혁안이다. 그것은 조선 초기의《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바탕하고 있는 왕조례를 17세기적인 주자학적 예 인식에 기초하여 일대 개혁을 이루고자 한 것이었다. 그의 이러한 일련의 예학적 업적은 사계 예학과 더불어 조선예학을 학문적 수준의 예학으로 발전시키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업적으로 평가되며, 또 그것은 예 질서의 재건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효과적으로 달성해 보려는 산림의 적극적 시도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선생은 예를 '인욕을 억제하여 천리를 보존하게 하는 법칙〔禮者 制人欲存天理底法則〕'이라고 정의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근본적으로 주자의 '이욕론(利欲論)'과 연관된 것으로서, 유교주의적 가치론에 직결된 논리였다. 주자는 대체로 천리가 존재하는 것을 '선(善)'으로, 그리고 부재하는 것을 '악(惡)'으로 인식하였으며, 기질지성상의 선악은 인간의 이성적인 노력 여하에 따라 선한 기질이 악한 기질로, 악한 기질이 선한 기질로 바뀔 수 있다고 인식하였다. 그렇다면 성리학에 근원한 실천적 도덕주의는 선을 보존하기 위한 인간의 의지적 노력을 최선의 것으로 인식하는 주의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주자의 '존천리멸인욕(存天理滅人欲)'을 성인의 가르침의 요지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선생이 정의한 예 개념은 도통적 가치론에 바탕을 두고, 그 가치〔善〕의 보존을 위한 법칙을 곧 예라 인식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선생의 예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또한 성리설에서의 인심도심설 및 계구신독설(戒懼愼獨說)과도 깊게 연관된다. 인심도심설은 천리와 인욕의 관계를 '심(心)'을 가지고 설명한 것이고, 또 제인욕을 위한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설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선생은 "인심이 도심의 명령을 따르면 인욕〔私慾〕이 다 없어지고 천리가 상존함으로써 사사물물이 스스로 과불급의 차이가 없어 중절(中節)을 얻게 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결국 그의 인심도심설은 그 자신이 정의한 이욕론(理欲論)적 예 개념과 상통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성리학적 수양론인 계구(戒懼)와 신독(愼獨)은 선생이 수신의 구체적인 방편으로 중시했던 예 사상이다. 계구·신독의 이론은 기본적으로 '경(敬)'의 사상에 바탕한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천리의 보존을 그 목적으로 하는 것이니, 이는 사계가 '거경(居敬)'을 통한 천리지정의 획득을 희구한 데서도 알 수 있는 바이다. 선생은 평생을 계구와 신독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그는 '혼자 걸어도 그림자에 부끄럽지 않고 혼자 잠을 자도 이불에 부끄럽지 않다.[獨行不愧影 獨寢不愧衾]'는 진덕수(眞德秀)의 말을 깊이 사랑하여 자신의 호를 '신독재(愼獨齋)'라 하고 그 실천을 위해 노력한 인물이다. 이와 같은 그의 계구·신독의 실천 의지는 그가 예를 인욕을 억제하여 천리를 보존하게 하는 법칙이라고 정의하게 된 실질적인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이제 선생의 예서에 나타난 예제(禮制)와 예설(禮說), 예문답들을 중심으로 그의 예학 사상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예 정신의 회복을 목표로 하는 복고적 예학 사상이다. 고례의 회복을 희구하는 복고적 예 사상은 주자·사계의 예학 정신을 계승한 것이다. 주자는 송 효종(宋孝宗)대에 고례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회복하지 못하였음을 탄식하였고, 사계는《가례》를 고증하고 또 보완하기 위하여 고례와 그 주석들을 깊이 연구한 바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사계의 예학은 자연스럽게 고례와 깊게 접맥되었고, 이러한 노력이 대를 이어 지속됨에 따라 그 경향은 선생에 이르러 고례의 예 정신에 더욱 주목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복고적 입장은 단순한 예 의식의 복고라기보다는 예 정신의 복고에 초점을 둔 것이었고, 기본적으로는《가례》의 터전 위에서 그 미완성 부분을 보완하는《가례》의 고례적 검증에 더 중점을 둔 것이었다. 이것은《가례》를 하나의 완성된 예서로 인식하여, 그 절대적 가치를 인정하려 한 박지계(朴知誡)의 예 인식이나,《가례》보다는 고례(古禮)에 우위적 가치를 인정하고 고례 연구에 치중한 한강(寒岡) 정구(鄭逑)나 미수(眉未) 허목(許穆) 류의 예 인식과는 구별되는 특징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정례(情禮)와 시의(時宜)를 중시하는 예학 사상이다. 선생의 예학은 고례의 예 정신을 존중하되 어디까지나《가례》를 기반으로 하면서 고례로써 이를 고증 보완하려는 경향이었다. 따라서 선생은 "모든 예(禮)는 인정(人情)에 따라 마련되는 것이니 명실(名實)이 맞지 않은 예는 있을 수 없다."고 하여 관습이나 형식에 매이는 것을 배격하고 오히려 정례(情禮)를 강조하였다. 이렇게 선생이 예 개념을 설정함에 있어 천리의 보존을 강조하면서도 또 인정을 중시한 까닭은 그가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의 조화(調和)를 희구하였기 때문이다.

선생은 또한 이와 함께 시의(時宜)를 중시하였다. 그는 "혹자가 외조(外祖)의 상중(喪中)에 혼례를 행할 수 있다 하는데, 이를 따를 수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우리 나라는 정세가 중국과 크게 다르고, 또 예는 인정에 맞게 만들어지는 것이니 어찌 가히 인정을 막고 고제(古制)에만 집착하여 우리 나라의 상행지절(常行之節)을 무너뜨리겠는가?"라고 대답하였다. 이것은 그의 예학사상이 형식적인 복고주의에 고착된 편협한 것이 아니라 예의 기본 정신에 바탕한 합리성(合理性)과 시의성(時宜性)을 중시하는 논리적이고 탄력적인 것이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가 된다. 그가 중국의 예제에 대해서 이렇게 단호한 거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간에 향상된 조선예학(朝鮮禮學)의 학문적 수준과 그 자신의 확고한 자주적 예학사상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선생의 자주적인 예학사상은 이후 18세기에 전개된 진경문화(眞景文化)의 성립에 한 중요한 사상적 연원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셋째, 보편성을 추구한 종법주의(宗法主義)적 예학사상이다. 17세기 중엽은 윤리 질서의 재건이 시대적 과제로 크게 부각된 시기였고, 예학은 이러한 과제를 해결하는 기본적 학문으로서 중시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질서를 바로하는 데에 기본이 되는 예설은 바로 종법(宗法)이었다. 그것이 질서 유지에 긴요한 예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후 조선 사회에서는 종법이 거의 헌법적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

일찍이 사계는 예의 기능을 '통서(統緖)를 바로 하는 것'이라 하여 종법의 통(統)의 기능을 강조했고, 이러한 입장은 사계와 선생의 모든 예서 및 예설에서 존중되었다. 선생은 "혹 장자(長子)가 폐질이 있다 하더라도 차자(次子)에게 전중(傳重)할 수 없다."고 하였으며, 또 "종법에 장자를 세움은 불역(不易)의 예(禮)이다. 아무리 유언(遺言)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를 따를 수는 없다."고 하였다. 선생은 또 적서(嫡庶)의 차별보다는 종지(宗支)의 위치를 더 중시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적서 차별을 완화하고 서자의 종법적 위상을 제고하는 예론을 전개하고 그 자신이 이를 실천해 보이기도 하였다. 그의 이러한 종법적 입장들은 결국 종법의 보편적 적용을 강조한 것으로서, 보편성의 추구라는 당시의 새로운 질서 논리를 정립하는데 일정한 기여를 한 것으로 생각된다.

넷째, 무실적(務實的) 예학사상이다. 선생은 철저히 실(實)을 숭상하고 허(虛)를 배격하였다. 그는 평소의 문인 교육에서도 "우리 유가(儒家)의 법문(法文)은 오직 실제적인 것을 위주로 해야 한다."고 하여 실(實)을 강조하였고, "학문을 하는 요체는 언행(言行)이 일치하고 유현(幽顯)이 일치 하는 것"이라 하여, 만년에는 자신의 호를 신독재(愼獨齋)로 자호하기까지 하였다. 선생은 비록 향음주례(鄕飮酒禮)와 같은 고례라 할지라도 그 진정한 의미를 구현하는 실질적 의례가 되지 못한다면 차라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하였고, 또한 예설의 전개에 있어서도 예컨대 '반곡후안신제(反哭後安神制)'와 같은 것은 명실(名實)이 맞지 않는 것이라 하여 그 실행을 반대하였다.

요컨대 선생의 예학은 17세기의 산림(山林)들이 전문적이고 자주적인 '조선예학(朝鮮禮學)'을 어떻게 이루어 냈으며, 또 '윤리 질서의 재건'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풀어 나가기 위하여 어떤 예학적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성과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선생의 예학사상은, "인욕(人欲)을 억제하여 천리(天理)를 보존하게 하는 법칙이 곧 예(禮)라는 확고한 인식을 기초로 하면서 고례의 이상적인 예 정신을 회복하고, 천리와 인정(人情)이 조화되고, 조선적인 시의성과 실용성을 갖춘 예제의 수립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종국적으로 그것은 무너진 예 질서를 회복하고자 하는 데 목표를 둔 것이었으며, 또한 종법의 보편적 원리를 강조함으로써 제한적이나마 시대적 과제인 보편적 질서의 수립을 지향하는 측면을 지닌 것이기도 하였다.

5. 맺음말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의 한국 사회에는 물질만능과 이기주의가 극도로 팽배하여, 전통적 가치와 도리가 실종되었다는 개탄의 소리가 날로 높아가고 있다. 어느 시대나 도덕적으로 완벽한 시대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또 전통적 가치가 무조건 다 복원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인간의 가치와 도리가 존중되는 기본적 도덕관념이 인간의 행복에 필수적인 요소임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지나치리만큼 강조해 온 전통 시대 선현들의 가르침에 다시금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17세기 중엽 이 땅을 살다 간 신독재 선생은 성리학을 통해 이러한 도덕관념을 체계화하고 또 예학을 통해 그 실천 방안을 제시한 선도적 지식인이었으며, 그 스스로가 이러한 예 관념을 몸소 실천해 보인 언행일치의 모범적인 예가(禮家)였다.

선생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윤리 질서의 재건'이 시대적 과제가 되고 있는 오늘 이 시점에서, 우리가 이러한 선생의 언행과 학문과 사상을 재조명하는 일은 참으로 시의적절한 시도가 아닐 수 없다. 선생의 문집인《신독재전서》에는 인간의 가치와 도덕적 귀감이 되는 주옥 같은 내용들이 듬뿍 담겨 있기 때문이다.

마침 민족문화추진회에서 선생의 문집을 모두 국역하여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하니 참으로 반갑고 귀한 소식이다. 이제 누구나 어렵지 않게 선생의 모든 글을 직접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본《신독재전서》해제는 다만 그 대강을 간략하게 소개한 데 지나지 않은 것이다. 미처 언급하지 못한 부분들은《전서》의 국역본을 참고하기를 바라며, 선생의 가르침을 따라 '인욕을 억제하고 천리를 보존함'으로써 보다 더 인간다워지고, 보다 더 행복에 가까워지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참고문헌